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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홍은전 칼럼] 탈시설지원법을 제정하라

등록 2021-03-29 04:59수정 2021-03-29 21:25

문이 잠겨 있어서 감옥인 줄 알았는데 그 반대였다. 어떤 문도 잠글 수 없어서 감옥 같았다. 향유의 집을 빠져나와 서울로 돌아올 때 아무도 그곳에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 새삼 기적처럼 느껴졌다. 텅 빈 수용시설이라니. 2009년의 나라면 절대 믿지 못할 것이다. 100년은 걸릴 줄 알았는데 겨우 12년이 걸렸을 뿐이다. 마지막 그것이 문을 닫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일까.

홍은전 ㅣ 작가, 인권·동물권 기록활동가

오는 4월20일 김포에 있는 장애인시설 ‘향유의 집’이 폐쇄된다. 한때 120여명이 살던 그곳은 얼마 전 마지막 거주인 30명이 지역사회로 돌아가면서 건물이 완전히 텅 비게 되었다. 향유의 집을 운영하는 사회복지법인 ‘프리웰’이 법인 해산을 목표로 수년간 거주인들을 탈시설 시켜온 결과다. 시설운영자가 제 존재를 배반하면서 스스로를 해체하게 된 데에는 대단한 역사가 있다. 프리웰의 본래 이름은 석암재단이었다. 2008년 이곳에 살던 장애인과 직원들이 시설의 비리와 횡포, 인권유린에 맞서 1년간 투쟁했고 결국 이사장이 구속됐다. 8명의 장애인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이듬해 시설을 뛰쳐나가 농성을 시작했다.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자유로운 삶, 시설 밖으로!” 본격적인 탈시설 운동의 시작이었다. 한편 석암재단은 시민사회가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진보적 인사들로 운영진이 교체되면서 프리웰로 새롭게 거듭났고 이후 시설의 해체를 결의함으로써 탈시설 운동의 또 다른 역사를 쓰는 중이다.

역사적인 시설 폐쇄 과정을 기록하기 위해 향유의 집을 방문했다. ‘시설=감옥’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는데 감옥이 텅 빈 것을 눈으로 확인하니 혁명이라도 일어난 것인지 실감이 나지 않고 얼떨떨했다. 20년간 이곳에서 일한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시설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마치 서대문 형무소 같은 구시대의 억압과 폭력을 담은 역사관을 구경하는 기분이었다. 한 방에 4~5명씩 촘촘히 살던 시절엔 모든 방의 문을 항상 열어두었다고 직원이 설명했다. 그래야 관리하기 편하기 때문이다. 욕실 문도, 화장실 문도 마찬가지였다. 문이 잠겨 있어서 감옥인 줄 알았는데 그 반대였다. 어떤 문도 잠글 수 없어서 감옥 같았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악착같이 자기만의 것을 갖기 위해 애썼다. 다른 이의 빨래와 섞이는 게 싫어서 속옷부터 양말까지 모조리 빨간색만 고집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종일 건물 바깥에 나와 앉아 있는 사람도 있었다.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아마 거기가 자기만의 공간이었던 것 같아요. 자기 방엔 자기 것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기옥 언니는 미리를 보살폈다. 기옥은 2009년 이 시설을 뛰쳐나온 8명 중 유일한 여성이었는데, 그의 증언은 7명의 남성들과 사뭇 달랐다. 1988년 서울역에서 껌을 팔다 단속에 붙잡혀 이 시설에 들어왔을 때 기옥의 나이 42세였다. 시설에선 여성 입소자들에게 장애 아동을 돌보게 해서 직원 인건비를 줄였다. 기옥이 키운 아이의 이름이 미리였다. “얼굴도 하얗고 너무 이뻤지.” 기옥은 미리에게 정이 푹 들었다.

세살부터 키운 아이가 스물네살이 될 때까지 기옥이 먹이고 씻기며 모든 걸 다 했다. 그런데 한 ‘선생님’이 둘을 몹시 구박했다. 기옥이 울면서 선생님 좀 바꿔달라고 원장에게 애원했을 때 원장은 직원이 아니라 기옥과 미리를 갈라놓았다. “미리는 1층에 남고 나는 2층으로 보내졌어.” 그 선생이 미리의 등허리를 팍팍 팼다는 소식을 들은 날 기옥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이가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어. 그래도 못 봤어.” 미리는 스물다섯에 세상을 떠났다. “너무 서러워. 미리하고 떨어진 것도, 미리가 많이 맞았다는 것도.” 건물의 2층에서 1층으로 걸어 내려가면서 나는 기옥을 생각했다. 기옥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미리가 있던 쪽이었다. 기옥에겐 절대 열리지 않던 문이 내 앞에선 스르륵 잘도 열렸다. 이듬해 그는 이 문을 박차고 미리가 없는 시설을 뛰쳐나갔다. 그때 기옥은 12년 뒤 오늘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향유의 집을 빠져나와 서울로 돌아올 때 아무도 그곳에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 새삼 기적처럼 느껴졌다. 텅 빈 수용시설이라니. 2009년의 나라면 절대 믿지 못할 것이다. 100년은 걸릴 줄 알았는데 겨우 12년이 걸렸을 뿐이다. 첫번째 시설이 문을 닫는 데 12년이 걸렸다면 마지막 그것이 문을 닫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일까.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발의된 ‘탈시설지원법’이 무사히 제정된다면 놀랍게도 그 시간은 ‘앞으로 10년’이다. 10년 내 모든 장애인시설을 해체하고 갇힌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법이 정말로 제정될까. 2021년의 나에겐 믿어지지 않는 말이다. 하지만 믿어지지 않는 말을 진지하게 자꾸자꾸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믿고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 믿기지 않는 세상에 살게 된다는 걸 나는 믿는다. “탈시설지원법을 제정하라.” 믿어지지 않는 말을 외치려면 나에게도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를 내 함께 싸워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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