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장에 취임하면 일주일 안에 재개발·재건축 규제를 풀겠다’고 공언한 오세훈 시장이 “신중하지만 신속하게 추진하겠다”고 말을 바꿨다.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될 공약을 내놨다가 거둬들인 것이다. 집값 안정을 위해선 그나마 다행이지만, 반성과 사과 없이 습관적으로 말을 바꾸는 오 시장의 태도는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안재승ㅣ논설위원실장
‘서울시장에 취임하면 일주일 안에 재개발·재건축 규제를 풀겠다’고 한 오세훈 시장의 공약은 두고두고 나쁜 공약의 사례로 언급될 것이다. 비현실적인 공약일 뿐 아니라 해서는 안 될 일이기 때문이다.
재건축·재개발 규제 완화는 서울시장이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중앙정부와 서울시의회가 결정권을 갖고 있는 사안들이 많다. 또 서울시 안에서도 민간전문가들이 절대다수인 도시계획위원회의 심의를 통과해야 한다. 2006년과 2010년 시장직을 연임했던 오 시장이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그런데도 큰소리를 쳤다.
실수요보다는 투기수요가 많이 몰려 있는 재건축·재개발 시장의 규제를 풀면 집값은 필연적으로 오른다. 이전의 수많은 사례들이 말해준다. 꼭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재건축·재개발 규제를 완화하더라도 개발이익 환수 같은 집값 불안 차단 대책을 함께 내놔야 한다. 그러나 오 시장의 공약집을 보면, 이런 대책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되레 기존의 재건축초과이익환수제마저 완화하겠다고 했다. 재건축·재개발 시장에 기름을 부은 셈이다.
오 시장의 공약은 이미 선거 기간 중에 큰 영향을 끼쳐, 그가 규제 완화 대상으로 지목한 강남구 압구정동과 대치동, 노원구 상계동, 양천구 목동, 영등포구 여의도동 등의 재건축 추진 아파트 단지의 가격이 급등했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을 보면, 압구정동 현대2차 전용면적 160.29㎡는 지난 5일 54억3천만원(8층)에 거래됐는데, 같은 면적이 지난해 12월7일 42억5천만원(4층)에 팔린 것과 견줘 11억8천만원 뛰었다. 넉달 만에 30% 가까이 오른 것이다. 지금도 호가가 계속 오르고 있다. ‘부동산 심판론’이 주효해 오 시장이 당선됐다는 게 믿기지 않을 지경이다.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후보도 ‘35층 제한’ 완화와 공공과 민간이 함께 협조하는 공공·민간 참여형 재건축을 공약했지만, 재건축 시장은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오 시장의 공약에 주목했다.
오 시장은 지난 12일 서울시 업무보고에서 재건축 단지 집값 상승을 막을 대책을 마련하라고 뒤늦게 지시했다. 사후약방문이다. 정말 서울시장 경험이 있는 건지 의문이 들 정도다.
집값 급등에 자신도 큰 부담을 느낀 탓인지 오 시장은 취임하자마자 ‘속도 조절론’을 내놨다. 오 시장이 한발 물러선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오 시장이 보인 태도는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실현 불가능한 공약을 내놓고 지키지 못하게 됐으면 공약을 수정하기에 앞서 솔직히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는 게 도리다.
그러나 오 시장은 지난 11일 국민의힘과 한 부동산정책 협의회 뒤 기자들과 만나 재건축·재개발 규제 완화와 관련해 “신중하지만 신속하게, 신속하지만 신중하게 추진하겠다”고 말을 바꿨다. ‘신중하다’의 뜻은 “매우 조심스럽다”이고, ‘신속하다’의 뜻은 “매우 날쌔고 빠르다”이다. 둘은 양립하기 힘들다. 곤혹스러운 상황을 얼렁뚱땅 넘어가겠다는 얘기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반성과 사과는 없었다. 이런 식으로 선거 때 표를 얻으려고 ‘아니면 말고’식 공약을 쏟아내고 당선 뒤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딴소리를 하는 게 용인된다면, 앞으로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너도나도 오 시장을 따라 하지 말라는 법이 없을 것이다.
앞서 오 시장은 ‘내곡동 땅 의혹’에 대해서도 말 바꾸기로 일관했다. 내곡동 땅 ‘셀프 보상’ 의혹이 처음 제기됐을 때는 “이 땅의 존재와 위치를 알지 못했고 지금도 위치를 모른다”고 했다가, 2008년 공직자 재산신고 때 이 땅을 신고한 사실이 드러났을 때는 “처가에 어떤 땅이 어디에 있는지 기억하는 분이 많으신가? 처갓집 땅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의식하지 못했다”고 했다가, 내곡동 땅 측량 현장에서 오 시장을 봤다는 증언이 연이어 나왔을 때는 “기억 앞에서는 참 겸손해야 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특히 “기억 앞에 겸손”은 말장난과 다르지 않다. 오 시장의 주장처럼 내곡동 땅 의혹의 본질은 ‘특혜 보상’ 여부일 수 있고 이것은 아직 진상이 규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 시장의 거듭된 말 바꾸기 또한 결코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정치는 대부분 말로 이뤄진다. 말은 신뢰가 생명이다. 잦은 말 바꾸기나 거짓말로 신뢰를 잃는다는 건 정치인에게 치명적이다. 오 시장은 지금이라도 재건축·재개발 공약이 무책임했던 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집값 상승을 초래한 것에 대해 진솔하게 사과하는 게 옳다. 세번째 시장 임기를 ‘거짓말 꼬리표’를 달고 시작할 수는 없지 않은가.
♣H6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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