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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해진의 세계+] 때로는 슬픔이 의무이다

등록 2021-04-18 13:21수정 2021-04-19 02:04

조해진 ㅣ 소설가

비가 갠 선선한 오후, 4·16 기억교실에 다녀왔다. 기억교실은 2014년 당시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 쓰던 교실을 옛 안산교육지원청에 그대로 재현해놓은 곳으로, 4·16 민주시민교육원과 함께 위치해 있다.

안산 고잔역에서 내려 10분 정도 걸으니 봄바람에 잔잔하게 펄럭이는 노란색 리본과 바람개비가 눈에 들어왔고, 정문 안으로 들어섰을 땐 세월호에서 끝내 내리지 못한 학생들과 교사들의 이름으로 가사가 구성된 노래가 귓가에 닿았다. 기억교실은 건물 2층과 3층에 걸쳐 이어져 있었다. 3층 안쪽엔 교무실도 마련되어 있었는데, 10시45분에 고정된 교무실의 벽시계 앞에서 나는 한참 동안 서 있기도 했다.

고백하자면, 기억교실에 들어선 순간 숨이 막혔다. 누구라도 그럴 터였다. 책상과 사물함, 낙서 가득한 칠판으로 채워진 평범한 교실이지만 그 교실에는 꽃과 사진 등이 올려진 책상들, 그러니까 살아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의 책상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7주기를 맞은 날이어서인지 추모객들이 꽤 많았다. 나는 최대한 많은 책상들에 눈으로 인사하며 교실들을 돌았고 간혹 꽃이 놓여 있지 않은 책상을 발견하면 잠시 그 의자에 앉아 책상 주인에게 말을 걸어보기도 했다. 기억교실을 둘러본 뒤엔 민주시민교육원 1층에 전시된 생일 시(詩)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희생된 아이들의 생일에 시인들이 돌아가면서 해당 아이에 빙의되어 쓴 이 시들은 <엄마, 나야>라는 제목의 시집으로 출판된 바 있다.

건물에서 나오자 다시 노래가 들려왔다. 어떤 감정 형용사도 없이 계속해서 이름만 부르는 그 담백한 노래를 듣는 동안 슬프다는 말도 사치 같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우리가 슬픔마저 잃을 때 더 슬퍼하는 사람들이 저편에 있다는 것을. 타인의 죽음은 산 자들을 순식간에 ‘잡동사니 허섭스레기’(권여선, <레몬>)로 만들어버릴 만큼 절대적인 무력감에 허덕이게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았다는 죄의식보다 슬픔이 더 커야 한다고, 왜냐하면 우리가 슬픔을 갖고 기억해야만 죽은 자의 자리도 존재할 수 있으므로.

사실 온전한 추모가 어려운 시절도 있었다. 세월호가 침몰되고 한동안 세상의 어떤 입들은 보상금을 이야기하기 바빴다. 김애란의 단편소설 ‘입동’(<바깥은 여름>)은 어린 아들의 죽음을 충분히 애도하기도 전에 보험금 문제에 직면하는가 하면 동네를 떠도는 소문과 호기심 어린 사람들의 시선에 고통스러워하는 부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세월호 이후 비정한 말들 속에서 무너져가던 유가족의 상처를 가늠케 하는 슬픈 소설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비정의 시대가 아닐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여전히 ‘교통사고’일 뿐이라고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지겹다고 푸념할 것이다. 자신의 삶에서는 죽음이 없을 거라고 믿는 아둔한 자들의 폭력적인 말들….

안산을 떠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케이크 하나를 샀다. 2년 전 이종언 감독의 영화 <생일>을 본 뒤 나는 4월16일마다 케이크를 사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기로 다짐했기 때문이다. 죽음의 날에 태어남의 노래를 부르는 것, 그러니까 죽음이 곧 새로운 태어남이라고 여기는 것이 비록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열여덟, 그리고 또 다른 어떤 나이에 고정되어 더 이상 플러스 원의 초를 꽂을 수 없는 아프고 아픈 친구들에게 태어나서 고마웠다고, 사느라 고생했다고 나는 말해주고 싶었다.

초를 끈 뒤 케이크 한 조각을 접시에 담으며 내년 4월16일에도 올해와 똑같은 슬픔으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리라 새롭게 다짐했다. 망각에 저항하며 기억의 영토를 지켜내는 것, 슬퍼할 수 있을 때까지 슬퍼하는 것, 그것이 산 자의 의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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