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윤여정(오늘쪽)과 한예리가 25일(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미향 | 문화부장
“그래서 책은 읽었니?” 양희은 선생의 출간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에 전화를 건 터였다. 허튼 인사를 싫어하는 그의 일침(?)에 화들짝 놀라 <그러라 그래>를 바로 샀다.
<그러라 그래>는 양희은 선생이 지난해 코로나19 확산으로 데뷔 50주년 콘서트가 무산된 아쉬움을 글로 달랜 인생 에세이다. “방어기제로 똘똘 뭉쳐” 날 서 있던 20대를 지나, 이제 “그러라 그래”라며 무엇이든 넘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긴 노년이 좋다는 그. 뻥튀기처럼 붇기만 했던 집안 빚을 갚아야 했던 청년 가장 시절부터 암 투병을 계기로 마당발을 벗어던진 서른살 즈음과, 그리고 치매 초기인 노모와 투덕투덕하는 최근까지 그의 인생은 결코 녹록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책 말미에 밝힌 것처럼 그는 “인생이 자신에게 베푼 모든 실패와 어려움, 실수와 철없는 시행착오가 다 고맙고 그 덕에 마음자리가 조금 넓어졌다”고 얘기한다.
글 어디에도 어른의 젠체하는 인생론이나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확신에 찬 조언은 없다. 술술 읽히는 이유다. 그의 솔직함이 촘촘히 박힌 글은 ‘아침이슬’ 양희은을 다른 각도로 읽어내는 데 도움을 준다.
읽는 내내 다른 이의 얼굴이 행간마다 어른거렸다. 둘은 닮은 점이 많다. 같은 70대다. 연예계에서 솔직한 성품으로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거로 유명하다. 아직도 일의 끈을 바짝 동여매고 놓지 않고 있다. 더구나 후자는 아카데미 여우조연상까지 거머쥘 정도로 말년에 ‘복도 많다’. 74살의 윤여정 말이다.
오비맥주는 27년 만에 카스를 투명 병으로 교체하면서 모델로 윤여정을 내세웠다. 백종원, 고든 램지, 엑소 등이 모델이었던 과거에 견줘 이례적이다. “나 같은 사람도 맥주 광고 찍고 세상 많이 좋아졌다”로 시작하는 광고의 콘셉트는 솔직함이다.
케이티(KT) 클라우드 센터 광고엔 목소리로 출연한 윤여정이 질문을 한다. “얘, 여기는 뭐 하는 데니? 데이터? 무슨 데이터?” 무지함을 천연덕스럽게 밝힌다. 나이가 들면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게 생각보다 어렵다.
이용자 70% 이상이 10~20대 여성이라는 여성의류 쇼핑플랫폼 지그재그도 윤여정을 선택했다. 2015년 출시된 지그재그는 인공지능 기술을 이용한 의류 추천 앱으로 구글 플레이스토어에서 누적 다운로드 수만 500만건이 넘는다. 윤여정의 손녀뻘 되는 이들이 이 앱의 주 고객층이다.
기업의 마케터야말로 대중의 열망에 민감한 이들이다. 그들의 촉이 맞아떨어지면 회사의 한해 농사는 걱정이 없다. 이들이 윤여정을 경쟁적으로 찾는 이유는 뭘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탔기 때문에? 오비맥주 관계자는 “에둘러 말하지 않는 윤여정의 성격이 브랜드 가치, 지향점과 맞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탄 윤여정이 소비의 대상이 아니다. 수상을 계기로 드러난 윤여정이란 콘텐츠가 주목받는 것이다. “밀레니얼 세대는 솔직하고 담백하고 투명한 걸 좋아한다.”
수상을 계기로 쏟아진 그에 대한 얘기를 종합해보면 이렇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고, 아랫사람이라도 그에게 실수하면 사과하는 사람. 재밌고 웃기는 사람을 좋아하며 본인도 재기와 위트가 넘친다는 것. 여전히 열심히 일하지만, 돈을 위해 일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이 중 으뜸은 솔직한 성품.
솔직하지 못하면 나와 상대의 생각의 거리를 가늠하기 어렵다. 거리만큼 오해가 생기고 때로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는다. 늙으면 기억이 흐릿해지는데, 간혹 기억의 이간질에 속으면 고집불통 노인이 되어 고립된다. 방지책은 자신에게도 솔직할 것. ‘진짜 어른’이 되기 위한 필수조건은 솔직함이다. 밀레니얼 세대가 윤여정에게서 본 건 ‘어른다운 어른’이다. 양희은은 책에서 “도대체 어떻게 아무런 흉도 없이 어른이 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흉에도 솔직하면 ‘어른다운 어른’이 될 수 있을 터. 우리는 ‘진짜 어른’을 여전히 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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