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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민형의 여담] 정치와 과학과 스푸트니크

등록 2021-05-05 14:57수정 2021-05-06 02:35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지난해 12월28일(현지시각) 남성 노인이 자국산 코로나19 백신 ‘스푸트니크 브이(V)’를 맞고 있다. 스푸트니크 브이는 그해 8월 러시아 정부가 세계에서 최초로 승인한 코로나19 백신이다. 모스크바/AP 연합뉴스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지난해 12월28일(현지시각) 남성 노인이 자국산 코로나19 백신 ‘스푸트니크 브이(V)’를 맞고 있다. 스푸트니크 브이는 그해 8월 러시아 정부가 세계에서 최초로 승인한 코로나19 백신이다. 모스크바/AP 연합뉴스

김민형ㅣ워릭대 수학과 교수

최근 세계의 관심이 러시아의 백신 ‘스푸트니크 브이(V)’에 집중되었다. 러시아에서는 정부 허가를 내준 것이 이미 작년 8월이었고 12월 초부터 일반인들에게 투여하고 있었지만 최초 연구 데이터의 불투명성과 대규모 시험의 결여 때문에 유럽과 미국 의학계의 신용을 받지 못하던 상태였다. 그러다가 3단계 임상시험의 긍정적인 결과가 권위 있는 의학저널 <랜싯>에 올해 2월 게재되면서 효력과 안전성이 주류 의학계의 인정을 받았고 지금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많은 서방국가에서도 유럽의약품청(EMA)의 허가를 기대하며 주문이 들어오고 있다. 화이자, 모더나, 코박신 등 여러 백신이 세계 각지에서 사용되면서도 효과적인 보급이 계속 문제시되는 가운데 믿을 만한 도구가 하나 더 생긴다는 것은 정말 반가운 일이다.

애당초 스푸트니크 브이 소식이 뉴스에 나왔을 때의 회의적인 반응도 재검할 만하다. 미국이나 영국 같으면 세 단계에 걸쳐서 철저한 제어하에 시험 대상의 수를 천천히 늘려가며 효과의 객관적인 신뢰도를 높인 다음에야 허가가 나오는 반면, 러시아 백신은 훨씬 간략한 절차 끝에 긴급 허가를 내주었다는 것이 의심의 요지였다. 서양 의학자들은 러시아 백신이 부작용이 있을 경우 인명 피해도 비극이지만 국제적으로 다른 백신에 대한 신뢰도 역시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를 보건정책의 관점에서 특히 강하게 표현했다. 그에 대해 백신을 개발한 모스크바의 가말레야연구소 소장 알렉산드르 긴츠부르크는 백신 등록과 사용 결정을 변호하면서 약간의 애국적인 긍지도 표현했다. 그에 의하면 세계적인 팬데믹이 오랫동안 없어 백신 연구가 서양에서는 인기 토픽이 아니었던 반면 러시아에서는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심층 연구가 계속되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축적된 전문성을 바탕으로 실험 절차를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가말레야연구소는 1891년에 설립됐다. 소비에트 혁명 이후 보건부 산하 연구소가 되면서 소련권 의학 연구의 선구자로 발전했고 세계적으로 천연두가 퇴치되는 과정에서 중심 역할을 하였다.

현재 유럽과 미국에서 팽배한 러시아 푸틴 정부에 대한 적대감도 비판적인 시각이 형성되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러시아 과학계가 연구 문화의 투명성이 부족하다는 비판과 긴급 허가가 정치적인 선전 효과를 노렸을 것이라는 지적은 물론 정당하다. ‘스푸트니크’라는 이름 자체가 1957년 서방국가들에 큰 충격을 주었던 세계 최초 인공위성의 이름을 따온 것으로 역사의식과 애국심을 동시에 수반한다.

소련이 붕괴한 지 30년이 지난 현재에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 과학기술을 평가절하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러시아 문화권의 창조적인 저력을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이 바로 수학 커뮤니티다. 1930년대 이후로 공산 체제 속에서 괴물 같은 천재 수학자들을 계속 창출한 역사를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소련 시스템 속에서 교육받은 수학자 가운데 필즈상을 수상한 사람이 8명이나 되고, 시스템 붕괴 조금 전인 1986년에 세계수학자대회가 미국 버클리에서 열렸을 때 초청 연사 80명 중 약 절반이 소련 출신이었다는 사실로부터도 소련 수학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소련 출신 수학자들은 서양 수학자들보다 훨씬 기이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이론을 전개한다는 강한 인상이 내가 대학원 다닐 시절에는 일반 상식이었다. 어떤 교육 시스템이 그런 풍부한 수학 문화를 가능하게 만들었는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그 여파로 나와 비슷한 세대 수학자들은 지금도 러시아에서 나오는 과학적 발견이 보도될 때면 일반인보다도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경향이 강하다.

정치·경제의 흥망을 따라 문화와 학문도 기복을 겪는 것은 당연하다. 1990년 이후로 뛰어난 수학자들이 대량으로 이민하면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수학 문화가 희석화돼버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기발한 소련식 학풍의 잔재를 가끔 목격하곤 한다. 다량 데이터의 처리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현대 생명과학의 조류를 고려하면 이번 백신의 개발 과정에서도 러시아 사회의 수학적 역량이 조금은 기여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도 내 마음대로 해본다.

정치적 경쟁의식과 (때로는 합당할 수도 있는) 편견이 학계에도 영향을 미치지만 세계 여러 지역의 과학자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에게서 배울 수 있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고 가능하다. 이번 스푸트니크 브이의 (잠정적인) 성공 또한 지역 전통이 체제의 변화를 어느 정도는 초월하면서 세계 과학 문화의 다양성에 지속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관점에서 받아들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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