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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아이돌그룹 7년차 징크스 / 최우성

등록 2021-05-05 16:27수정 2021-05-06 02:39

한겨레 자료사진
한겨레 자료사진

| 최우성 경제산업부장

아이돌그룹 7년차 징크스란 게 있단다. 유독 그룹 결성 7년차에 이르면 누군가는 독자 행보에 나서거나 다른 가능성을 찾겠다며 기존에 몸담고 있던 연예기획사를 홀연히 떠나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자연스레 그룹이 깨지거나 서둘러 다른 멤버를 투입해 새출발하는 수순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물론 징크스란 단어의 속성이 그러하듯, 필연의 영역이라기보다는 기껏해야 여러 사례가 모여 생겨난 사소한 경험칙에 불과할 테지만.

지난 2009년 공정거래위원회가 ‘연예인 표준약관에 따른 전속계약용 표준계약서’ 작성을 의무화한 일과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당시 국내 주요 기획사들이 유명 아이돌그룹 구성원과 맺은 매우 불공정한 계약 내용이 공개돼 사회적 논란이 커지자, 공정위는 전속계약 유효기간을 7년으로 단축·제한했다. 전속계약 기간을 길게 잡아 계약관계에서 우월적 지위에 서 있던 기획사의 힘을 빼는 대신, 아이돌그룹 구성원(연예인)의 선택권을 늘려주자는 취지였다. 전속계약 유효기간이란 프로스포츠 세계의 프리에이전트(FA) 제도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예를 들어 현행 한국야구위원회(KBO) 프로리그의 관련 규정은 기본적으로 국내 리그에서 9시즌을 뛴 선수에 한해 에프에이 자격을 허용한다. 전속계약 기간이 짧을수록 한쪽(기획사·구단)의 영향력은 줄고 다른 한쪽(연예인·선수)의 발언권이 세지는 건 ‘논리적으로’ 당연한 이치다.

과연 그럴까. 냉정한 심성의 경제기자 눈엔 전속계약 유효기간 단축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흐름에 눈길이 더 오래 머문다. 잠시 기획사 사장님에 빙의해보련다. 기획사 입장에서 전속계약 유효기간의 단축은 도덕적으로는 마음이 끌릴지언정 이성적으로는 선뜻 받아들이기 쉽지만은 않은 압박이다. 당장 회사 수익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서다. 연습생을 뽑아 교육·훈련시킨 뒤(①) 정식 데뷔시켜 활동하게 만들고(②) 그룹 활동이 끝나더라도 일정 기간 지식재산권 수익을 챙기는(③) 게 기획사 사업구조의 기본 얼개다. 단순 셈법으로 기획사의 수익성은 (②+③)/①의 크기에 달려 있다.

문제는 전속기간 유효기간 단축은 분자값(특히 ②)을 줄여 수익성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 이 경우 기획사 사장님이 보일 극히 ‘합리적인’ 행동은 분모값(①)도 덩달아 줄여 (②+③)/①의 비율을 최대한 유지하는 일일 게다. 실제로 시간이 흐를수록 국내 기획사 문턱을 넘는 연습생의 스펙이 예전보다 월등하게 높아졌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도는 건 우연이 아니다. 과거엔 기획사가 춤과 노래를 가르치고 외국어 학습을 지원하며 심지어 외모를 가꾸는 데도 기꺼이 공(돈)을 들였다면, 이젠 그 자리를 모든 걸 이미 갖춘 후보자들이 하나둘 대체하는 셈이다.

국내 연예기획산업의 이런 풍경은, 분명 채용시장의 트렌드란 이름으로 포장된 거대한 사회변동 흐름의 한 단면이다. 시장 경쟁이 격화하고 수익성 압박이 거세질수록 대부분의 기업이 꺼내 드는 첫번째 대응 카드는 비용의 외부화일 가능성이 크다. 시장 지위가 높은 기업일수록 이런 유혹은 달콤하기 그지없다. 채용과 관련해선 고용시장에 갓 진입한 신입보다 경력직 채용에 무게를 싣는 형태로 나타나곤 한다. 물론 채용은 과정 자체가 어느 기업에나 엄청난 리스크 요인이다. 산업 패러다임이 빠르게 변화함에 따라 산업 현장의 입맛에 딱 맞는 신규 노동력을 찾기 어려운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리스크와 비용을 최대한 줄이면서 최선의 인재를 구하려는 기업의 행동을 나무랄 수만은 없는 이유다. 다만 너도나도 내 돈이 들어가지 않는(=남이 돈을 댄) ‘남는 장사’에만 몰두하는 일련의 흐름은 우리 경제 생태계의 혁신과정이라기보다는 외려 위기의 상징적 징후로 읽는 게 옳다. 씨앗을 뿌리지 않고도 곧장 열매 맺는 세상, 극단적으로 분모값(①)이 0에 수렴하는 세상은 현실에선 불가능하다. 수많은 ①이 포개지고 합쳐져 결국엔 경제의 총수요를 떠받치는 까닭이다.

세상은 여전히 불합리투성이인지 모른다. 경제라는 수레바퀴에 최소한의 합리성을 기름칠해준 게 자본주의의 공이다. 다만 자본주의의 역동성을 신뢰하고 존중하는 사람일수록 분명하게 새겨야 할 게 있다. 합리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외려 너무 합리적이어서 자기 스스로 기반을 허물어뜨리는 게 자본주의의 또 다른 얼굴이자 비밀이라는 역설을.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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