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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공무원 초과근무수당, 거악만 적폐일까 / 이순혁

등록 2021-05-10 14:55수정 2021-05-17 18:03

노원구청 누리집 갈무리
노원구청 누리집 갈무리

[편집국에서] 이순혁 ㅣ 전국부장

“구청에 근무하는 남편은 거의 매일 아침 6시에 출근하고 밤 10시가 넘어야 퇴근한다. 한달에 몇번은 거리질서, 조기청소 때문에 더 일찍 출근하고 어떤 때는 심야영업 단속을 한다며 자정을 넘기고 새벽에 들어와야 한다. (…) 그런데도 경찰공무원 등에게는 지급되는 시간외근무 수당이 일반공무원에게는 없다.”

<한겨레> 1990년 5월9일치 독자투고란에 실린 글의 한 대목이다. 부산에 사는 독자 김가희씨는 밥 먹듯 야근을 하는 공무원 남편 사연을 소개하며 ‘말단 공무원들에게도 시간외수당을 지급하는 등 처우 개선이 시급하다’고 호소했다.

닷새 뒤 같은 난에 신강순 총무처 보수과장의 답글이 실렸다.

“올해 10월부터는 정상근무시간 외의 과중한 업무에 대한 보상을 위해서 일반직공무원 등에게도 시간외근무 수당 제도를 도입하고 연가보상을 지급하는 등 (…) 머지않은 장래에 공무원들이 일한 만큼의 보수를 받고 생활에 걱정이 없이 안심하고 직무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초과근무에 따른 수당 수령은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지만, 대한민국이 만들어지고도 무려 40여년 동안 공무원들은 이 당연한 권리를 누리지 못했다. 6월항쟁으로 민주화가 진전되고 올림픽 개최로 전세계에 나라 이름을 알리던 시절까지도 공무원들은 공짜 야근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데 1990년 일반직 공무원(5급 이하)을 대상으로 시간외수당이 도입된 뒤, 이번엔 정반대 비정상이 일상화된다. 하지도 않은 초과근무를 신고하고 수당을 받아가는 관행이 공직 사회에 널리 뿌리내린 것이다.

1996년 3월21일 인천시가 야근 불시 복무점검에 나섰는데, 이날 밤 10시까지 근무한다고 보고한 시청 직원 168명 가운데 실제 그 시간까지 일한 공무원은 단 8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신청자의 95%가 허위보고로 수당을 챙긴 셈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한 지방자치단체 하위직 공무원에게 ‘양심껏 시간외수당을 청구하는 공무원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라고 물었다. “한 10%쯤?”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최근 화제가 된 ‘초과근무수당 부당청구 동참을 거부했다가 직장내 괴롭힘을 당했다’는 서울 노원구청 방호직 9급 공무원의 내부고발도 비슷한 현실을 보여준다. 구청 인사 실무를 총괄하는 팀장이 9급 공무원에게 했다는 말이 퍽 인상 깊었다.

“초과(근무신청)를 찍으면 좋은 일이 있으니까 (상급자는) 좋은 의도로 얘기했는데….”

하지도 않은 초과근무를 체크한 뒤 받는 수당이 ‘좋은 일’이었구나!

해방과 전쟁 뒤 폐허 속에서 나라를 일으키던 시절 나라 살림은 늘 쪼들렸고, 공무원들도 박봉에 시달려야 했다. 일반직은 대가 없는 야근도 감내해야 했고, 경찰과 체신직(우체부) 등 일부 특수직역은 시간외수당을 받았지만 수당지급 기준(액수)은 턱없이 낮았고 그나마 ‘일한 만큼’이 아닌 ‘책정된 예산 안에서’ 받아갈 수 있는 구조였다.

1960년대 신탄진 연초제조창(당시는 담배를 만드는 전매청 직원도 공무원이었다) 노동자들이 1.5배 가산임금을 주는 근로기준법에 따라 시간외수당을 지급하라고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1·2심에서 승소했다가, 대법원에서 “국가기관과 단체협약을 맺은 고용원들은 근로기준에 앞서 국가공무원법에 따라야 한다”며 파기한 일도 있었다.

그러다 생겨난 각종 수당은 사실상 낮은 봉급을 벌충해주는 수단 성격이 강했다. 정부 또한 기본급 인상은 부담스러운 만큼, 활동성 경비인 수당 예산을 확대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시절이 다르다. 대기업보다 급여는 적을지 모르지만 업무 부담 적고 신분이 보장되는 공직의 선호도는 예전과 비할 바 아니다. 고령화 속에 은퇴 뒤 받는 공무원연금의 값어치 또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그런데도 높은 경쟁률을 뚫고 공무원이 된 이들이 야근시간을 조작해 수당이나 받아가는 대열에 합류해야 한다니, 너무 슬픈 일 아닌가.

흔히들 시대의 키워드로 ‘공정’을 손꼽는다. 거악만이 공정의 적은 아닐 터. 누군가는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 ‘국가에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도둑놈이 많습니다’라는 구호에 동조하는 이가 더 늘기 전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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