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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범선의 풀무질] 소가 쉴 곳

등록 2021-05-30 13:53수정 2021-05-31 02:08

전범선의

풀무질

올해는 소의 해라고 한다. 신년 벽두에는 소의 이미지들이 넘쳐났다. “신축년 반갑소” 같은 언어유희와 함께 소의 모습이 연하장에 실렸다. 안부를 묻는 인사말이 오가는 사이, 나는 의아했다. 소의 해, 과연 소들은 안녕한가?

지난여름을 떠올린다. 기후위기로 인한 홍수가 전남 구례를 강타했다. 축사를 덮친 물을 피해 소들은 지붕 위로, 산으로, 섬으로 갔다. 나는 소들이 그렇게 수영을 잘하는지 몰랐다. 55㎞ 떨어진 남해의 어느 무인도까지 헤엄쳐 살아남은 이가 있었다. 생후 16개월, 임신 4개월 차의 여성이었다. 우두머리를 따라 질서정연하게 해발 531m 암자로 피신한 10여명의 무리도 있었다. 쇠고기 이력제 시스템상 귀표 번호 마지막 다섯 자리가 90310인 15개월령의 여성은 농장주의 집 지붕 위에서 버텼다. 어떻게 거기까지 올라갔는지 나는 상상도 되지 않는다.

역대 최장기 장마로 전국에서 1213명의 소가 죽었다. 기후위기는 인간과 비인간 동물을 가리지 않는다. 사회적 최약자인 가축은 인간이 초래한 재난에도 가장 취약하다. 90310이 난생처음 축사 밖에서 마주한 세상은 물바다였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그를 인간들은 기중기로 집어서 ‘구조’했다. 무인도에서 표류하는 소를 ‘구조’하기 위해 바지선과 어선 2척이 투입되었다. 내가 알기로 ‘구조’란 살리는 일인데, 어폐가 있었다. 90310은 일주일 만에 도살장으로 끌려갔다. 살해되고, 분해되고, 포장되었다. 그의 사체는 ㎏당 4020원에 팔렸다.

소 축산업은 기후위기의 주범이다. 위가 네개인 소는 되새김질을 하면서 트림과 방귀와 똥으로 메탄을 방출한다. 메탄은 이산화탄소보다 약 30배 강력한 온실가스다. 인류가 매년 방출하는 510억톤의 온실가스 중 19%가 농축산업에서 발생한다. 농경지의 대부분은 가축 사료 생산을 위한 것이니, 사실상 전부 축산업의 몫이다. 나머지 제조(31%), 전기(27%), 운송(16%), 냉난방(7%)은 화석연료를 이용한 전력 생산과 직간접적으로 관련 있다. 따라서 오늘날 인류의 지상과제인 탄소배출 ‘순제로’ 달성은 탈석탄과 탈축산으로 요약된다. 석탄, 석유, 가스를 태우고, 소고기와 소젖을 먹는 한 기후위기는 악화될 것이다.

이제 석탄발전소뿐만 아니라 소 농장도 좌초자산으로 봐야 한다. 정의로운 전환을 위해 정부의 전업 지원이 필요하다. 홍수로 집과 축사를 잃은 구례 군민 50여명은 작년 10월 청와대를 찾아 고통을 호소했다. 90310의 농장주는 컨테이너를 놓고 살았다. 앞으로 이런 기후재난은 빈번해질 것이다. 나는 올여름이 두렵다.

인천에는 불법 농장 ㄱ이 있다. 현재 개 150여명과 소 15명이 그곳에 살고 있다. 지자체에서 곧 철거 예정이기 때문에 그들은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섰다. 개들은 시민들이 힘을 모아 구조하고 있다. 여기저기 입양을 보낸다. 하지만 소들은 쉽지 않다. 구조하더라도 보호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농장주는 추석까지 데려가지 않으면 소를 도축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해외에는 축산 피해 동물을 위한 ‘생추어리’(sanctuary), 즉 보금자리 내지 안식처가 많다. 미국에만 200개가 넘는다. 소, 돼지, 양, 염소, 닭, 오리 등이 편안히 여생을 보내는 곳이다. 윤리적이고 지속가능한 인간-동물 관계를 상상하는 출발점이다. 좌초자산인 동물 농장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불가피한 과도기적 장치다.

한국에도 소가 쉴 곳이 필요하다. 동물권단체 ‘동물해방물결’은 불법 농장의 소들을 살리기 위한 캠페인을 개시한다. 소의 해, 우리는 소들을 살릴 수 있을까? 또다른 90310이 나타났을 때 나는 속수무책이고 싶지 않다. 소를 살리는 것이 바로 지구를 살리고 나를 살리는 일이다.

가수·밴드 ‘양반들’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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