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창] 야마구치 지로 ㅣ 호세이대학 법학과 교수
지금 일본 정치에서 가장 큰 쟁점은 오는 7월23일 개막하는 도쿄 올림픽·패럴림픽을 예정대로 개최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코로나19 감염이 멈추지 않고, 변이 바이러스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으며 백신 접종도 선진국 가운데 가장 늦은 일본에서는 ‘의료 붕괴’가 현실화되고 있다.
오사카, 홋카이도 등에서는 코로나에 감염돼도 병원에 입원하지 못하고 호텔과 자택에서 대기하다 숨지는 사람이 잇따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올림픽이 열리면 가뜩이나 부족한 의료 자원이 올림픽에 쏠리게 돼 국민의 생명은 뒷전으로 밀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여러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70~80%는 올림픽을 다시 연기하거나 취소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스가 요시히데 총리는 예정대로 올림픽을 개최하겠다는 뜻을 거듭 밝혔다. 이제 일본 정부는 합리적 정책 결정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정치를 보면,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직전 일본 지도자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76년 전과 지금의 지도자에게는 많은 공통된 사고법이 발견된다.
첫째, 말을 바꿔 현실을 은폐한다. 최근 일본 언론에선 ‘의료 붕괴’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는다. 병상이 부족해 자신의 집에 격리되는 사람을 ‘자택요양’이라고 한다. 이는 패배, 퇴각을 전진이라 한 대본영(일왕의 직속기구이자 전시 최고 통수기관)의 발표와 같다.
둘째, 기정사실로 취급해 밀어붙인다. 군 지도자들은 전쟁 중 중국 대륙 점령지에서 철수하는 것을 그동안 치른 희생과 비용이 허사가 된다며 반대했다. 이처럼 잘못된 방침을 전환하지 못하는 상태가 기정사실의 굴복이다.
도쿄올림픽을 둘러싸고 정치지도자는 기정사실에 속박돼 있다. 올림픽을 취소하면 지금까지 투입한 자금은 무용지물이 된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매몰 비용’이라고 한다. 매몰 비용의 발생은 정책 결정자의 전망이 잘못됐다는 것을 나타내는 핵심적 증거다. 그러나 매몰 비용을 두려워한 나머지 실패할 것이 뻔한 사업에 자원을 계속 쏟아부어 더 큰 파국을 초래하는 것은 최악의 경영자다. 스가 총리도 올림픽 개최를 놓고 최악의 경영자가 하는 행동을 하려고 한다.
셋째, 공허한 국가 목표를 위해 국민감정을 부추겨 국가의 위신을 지키는 것도 전쟁 때와 지금의 공통점이다. 스가 총리가 올림픽에 집착하는 것은 이후 정치 일정과 관련이 있다. 총리는 올림픽을 개최하고 일본 선수들의 활약으로 분위기가 고양된 뒤, 올 10월 임기가 끝나는 중의원 총선거를 치르고 싶은 야망을 갖고 있다. 의료 전문가들이 올림픽 개최에 따른 위험성을 지적해도 총리는 괜찮다는 주관적 신념을 앞세워 과학적 데이터를 무시한다. 이런 정신 구조는 ‘1억 옥쇄’ ‘본토 결전’이라는 전쟁 중의 슬로건을 생각나게 한다. 국민의 생명을 먼저 생각하고 올림픽을 단념하겠다는 정치적 결단을 보여주면, 정치인으로서 신뢰감이 높아질 텐데 총리는 그런 계산도 못 하는 것 같다.
76년 전 패전에서 큰 희생을 치른 뒤 일본은 민주주의를 확립하고 국민의 뜻에 입각한 정치, 과학적 합리성에 근거한 정책을 추진하게 됐다. 하지만 일본이 잘못된 정책을 결정하게 된 정치 시스템을 바꾼 것은 아니었다. 광신의 정치는 악성 바이러스처럼 일본 정치 내부에 숨어 있었을 뿐, 다시 표면화되고 있다. 다만 76년 전과 달리 지금의 일본에는 언론의 자유가 있다. 정책이 잘못됐을 때 언론은 언제든 비판을 할 수 있다. 몇몇 신문은 올림픽 취소를 사설로 내보냈다. 앞으로도 논의는 계속해야 한다.
일본 정치의 이런 병리에 대해 필자가 쓴 <민주주의는 끝나는가>라는 책이 최근 한국어판으로 나왔다. 일본에 관심이 있는 독자가 읽어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