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무 경제부장
편집국에서
컴퓨터의 영문 자판을 보면 암호처럼 배열돼 있다. Q W E R T Y ….
초창기 타자기는 긴 활자막대가 엉켜 골치였다. 이 때문에 입력은 성가시지만 엉키지 않게 고안된 것이 인기를 끌었다. 기술의 발달로 활자막대 문제는 해소됐으며, 더 편리하게 배열된 자판도 여럿 나왔다. 그렇지만 속도가 느린 ‘숄스’의 자판은 살아남았고 오늘날 표준이 됐다. 타이피스트와 타이핑을 가르치는 교사의 손에 익었기 때문이다.
스탠퍼드 대학의 역사학 교수 폴 데이비드는 이러한 자판 배열의 역사에서 경제학적 의미를 끌어냈다. 경제 현상은 자유경쟁의 원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지배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경로 의존’이라 일컫고, 정부의 적극적 역할이 요구되는 논거로 제시했다.
곧, 합리성이 결여된 선택도 사회적 관성에 따라, 여건이 변하더라도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오늘의 선택에까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세금 문제는 그 어떤 것보다도 경로 의존적이다. 내 호주머니의 한 푼 두 푼에 관한 문제이고 숱한 사람들의 이해가 걸렸기에 살짝만 건드려도 시끌벅적하다. 그렇다고 결함 있는 세제를 타자기 자판처럼 경로 의존에 맡겨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양극화 해소와 미래를 위해 정부는 조세체계와 재정 전반을 손보겠다고 밝혔다. 방향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스스로 공격의 빌미를 자초해 어려움에 빠졌다. 청와대와 정부는 뜻은 있지만 야물지 못하고, 열린우리당은 오락가락하는 탓이다.
이런 일은 치밀한 전략 없이는 한걸음도 나가기 어렵다. 전략의 핵심 요소는 분명한 원칙과 중장기 시간표, 그리고 설득력이다. 전환기에 전략은 정부의 큰 덕목이다. 전략 없는 정부는 무능하다.
세제 개편안의 하나로 불거져 나온 소득세 세액공제 축소가 마치 전부이고 세제 개악인 것처럼 부풀려져 ‘의사 쟁점화’하고 있는 것은 더욱 일탈적이다. 양극화 해소와 미래를 위해 세입·세출에 패러다임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데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어렵사리 만들어진 공감대가 흔들려선 안 된다.
비과세나 감면 축소는 범위를 따져봐야겠지만 방향은 원칙적으로 맞다. 비과세나 감면은 ‘조세 지출’이다. 세금으로 들어올 돈이 원천적으로 새 과세기반을 허문다. 지난해 기준으로 20조원, 국세의 14.5%에 이른다. 물론 정책 목적상 꼭 필요한 것도 있다. 하지만 정치적 필요로 만들어지고 관행으로 존속되는 것들도 적지 않다. 논란이 되는 1~2인 가구 추가공제 폐지도, 가족 수가 적은 가정이 더 우대받는 공제제도의 문제점에 손을 댄 것이다. 우선순위론자들은 만만한 봉급쟁이가 아니라 고소득 전문직, 자영업자나 자산소득·불로소득 쪽부터 세금을 더 거둬야 한다고 말한다. 백번 타당한 지적이다. 그에 못지않게 비과세 감면제도로 구멍이 숭숭 뚫린 과세기반을 정비하는 것도 중요하다. 함께 가면 된다. 정말 경계해야 할 것은 월급쟁이 동정론자들이다. “오히려 양극화를 극대화하는 정책” “세금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라며 ‘가렴주구하는 탐관 대 가난한 백성’의 사극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 정치적 함의는 철두철미한 경로 의존이다. 몇 푼 세금으로 공분을 일으킴으로써, 더 큰 세금 문제에 눈과 귀를 막으려는 것이다. 벌써부터 양극화 해소를 위한 재원 마련 계획은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러한 ‘경로 고수주의자’들을 잠재워야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 정영무/경제부장 young@hani.co.kr
비과세나 감면 축소는 범위를 따져봐야겠지만 방향은 원칙적으로 맞다. 비과세나 감면은 ‘조세 지출’이다. 세금으로 들어올 돈이 원천적으로 새 과세기반을 허문다. 지난해 기준으로 20조원, 국세의 14.5%에 이른다. 물론 정책 목적상 꼭 필요한 것도 있다. 하지만 정치적 필요로 만들어지고 관행으로 존속되는 것들도 적지 않다. 논란이 되는 1~2인 가구 추가공제 폐지도, 가족 수가 적은 가정이 더 우대받는 공제제도의 문제점에 손을 댄 것이다. 우선순위론자들은 만만한 봉급쟁이가 아니라 고소득 전문직, 자영업자나 자산소득·불로소득 쪽부터 세금을 더 거둬야 한다고 말한다. 백번 타당한 지적이다. 그에 못지않게 비과세 감면제도로 구멍이 숭숭 뚫린 과세기반을 정비하는 것도 중요하다. 함께 가면 된다. 정말 경계해야 할 것은 월급쟁이 동정론자들이다. “오히려 양극화를 극대화하는 정책” “세금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라며 ‘가렴주구하는 탐관 대 가난한 백성’의 사극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 정치적 함의는 철두철미한 경로 의존이다. 몇 푼 세금으로 공분을 일으킴으로써, 더 큰 세금 문제에 눈과 귀를 막으려는 것이다. 벌써부터 양극화 해소를 위한 재원 마련 계획은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러한 ‘경로 고수주의자’들을 잠재워야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 정영무/경제부장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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