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20일 미국 애틀랜타의 주의회 의사당 앞에 모인 시민들이 아시아계에 대한 증오범죄를 중단하라며 항의시위를 하고 있다. 인종차별과 갈등은 선진국일수록 첨예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애틀랜타/EPA 연합뉴스
| 김민형 워릭대 수학과 교수
“세계 인구 중에 순백인의 비율은 매우 작다. … 유럽에서도 스페인인, 이탈리아인, 프랑스인, 러시아인 및 스웨덴인은 일반적으로 거무스름한 색이다. 독일인도 대체로 거무스름한데 그중 작센족만이 영국인과 함께 지구상에서 백인의 주류를 이룬다.” 미국의 사상가 벤저민 프랭클린이 1751년에 쓴 에세이 <인류의 증가, 국가, 이민 등에 관한 고찰>에 나오는 대목이다.
내가 2007년 영국으로 이사 오면서 인종에 대한 의식이 미국에 살 때와 상당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당시 아직 어렸던 아이들과 런던 시내 공원에서 놀면서 주위 사람들을 관찰하면 미국에서 흔하던 흑인, 백인, 황인 식의 분류법에 잘 들어맞지 않는 모습이 많았기 때문이다. 신체적 특징들의 연속적인 분포가 몸으로 느껴진 것이다. 피부색 같으면 백인과 흑인이라고 할 만한 극단 사이에 굉장히 다양한 색깔을 볼 수 있었다. 추정하기로는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의 인구가 꽤 고르게 섞여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런던에는 백인과 흑인, 동양인도 많지만 중동인, 남아시아인, 유럽에서도 중부, 지중해, 발칸반도, 그리고 구소련의 영역 방방곡곡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
20세기 이후로 과학자들은 생물의 분류를 두가지 상호보완적인 시각으로 접근한다. 유전적 요소들을 고려한 ‘유전자형’에 의한 분류와 생물체의 발생과 성장 과정에서 나타나는 외부 특징들을 이용한 ‘표현형’적 분류가 그것이다. 물론 우리가 일상적으로 인식하는 현상은 생물의 표현형이다. 생물학적 분류를 따르면 인간은 다 같은 종이지만, 어느 관점에서든 그 안에 ‘인종’이라는 구분이 어느 정도 유의미한지 물을 수 있다.
영어에서 ‘race’(인종)라는 단어는 16세기께부터 다소 불분명하게 사용되다가 17~19세기 대영제국이 확장하면서 일종의 생물학적 개념으로 차차 자리 잡았다고 한다. 그때쯤 미주 원주민이나 아프리카인과 유럽인의 차이를 과학적인 분류로 생각하는 관습이 생겨났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런 개념은 정치적 판도와 사회적 편견의 영향 속에서 형성됐기 때문에 시대적 분위기에 따라 특정한 모집단이 백인으로 분류되기도 안 되기도 한 사례들이 몇몇 있다. 프랭클린 역시 ‘유럽인’ 중에서도 독일인처럼 열등하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을 백인의 서열에서 제외하고 싶었던 것이다.
인종이란 것이 실제 존재하는가 물을 때 한가지 조심할 점은 이 질문의 정확한 해석이다. 표현형이든 유전자형이든, 다양한 형태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종 차이로 오해하는 일을 종종 볼 수 있다. 가령 한국인과 영국인은 상당히 다르다는 상식적인 관찰을 인종의 분류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진 인종은 통계적 ‘군집’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수학적 개념이다. 달리 이야기하면 다양한 인류의 집합을 다 모아 놓았을 때 이런저런 부분 집합 사이에 ‘자연스러운 경계선’이 존재하는가가 관건이다. 서울을 강북과 강남으로 나누어서 생각하는 것은 자연 경계를 근거로 한 구분이지만 서울과 경기도는 서로 다른 지역이면서도 둘 사이의 경계는 역사와 편의와 임의성의 복합적인 효과로 나타났을 것이다. 강북-강남의 구분도 강원도를 포함한 나라 전체의 관점에서는 물론 의미가 사라진다. 인종이라는 개념을 정확하게 거론하려면 인간의 형태에 관한 측정 가능한 데이터를 모아 놓고 몇개의 군집을 이루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인간 디엔에이(DNA)의 구성요소들을 완전히 나열하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1990년에 시작해서 2003년 종결되었다. 이후로 ‘유전자형’ 관점에서 여러 인간들의 데이터 기반 비교가 가능해졌다. 인구 유전학을 기반으로 따져본 인종의 존재 여부는 열띤 토론으로 이어져서 지금 현재로는 인종이 없다는 방향으로 과학계의 의견이 모아지는 경향이다. 즉 여러 유전인자나 측정 가능한 외부 특징의 분포는 군집의 형성을 불가능하게 하는 큰 ‘인류 덩어리’를 이룬다는 의견이 주류이다. 물론 인종의 유의미함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학자들도 아직 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유럽만 포함하는 테두리를 긋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인정해서 ‘통계적인 백인’의 분류 속에 북아프리카인, 중동인, 북인도인 등을 포함시킨다.
이민과 관련된 이슈가 자주 거론되는 세상에서 ‘인종’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사회적 갈등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 분쟁의 복잡한 배경에도 한쪽은 일종의 유럽인 정체성이 강하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문명과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지중해 주위의 문화권을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나누는 것은 물론 불가능하다. 인종의 구분은 그보다도 더 모호하다는 사실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