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전치형의 과학 언저리] 로봇의 배신

등록 2021-06-03 15:15수정 2021-06-04 15:43

로봇은 종종 우리의 기대를 배신하고, 특히 뉴스 자막 편집자를 곤란하게 만든다. 편집자 잘못이 아니지만, 로봇 뉴스 자막은 모순에 빠졌다. ‘4차 산업혁명 특별시’라는 대전의 한 방송국에서 뉴스를 편집하는 이들은 다음 로봇 뉴스에 어떤 자막을 달아야 할까.

전치형ㅣ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대전 문화방송(MBC)에서 뉴스 자막을 편집하는 사람의 고충에 대해 생각한다. 뉴스에 제목을 붙이고 내용을 요약하는 자막을 다는 일을 한 사람이 하는지 여러 명이 돌아가며 하는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어떤 경우든 어려움이 작지 않으리라 짐작한다. 유튜브에서 ‘대전 MBC 로봇’을 검색해서 지난 몇달 동안 나온 뉴스 영상과 자막을 찾아보다가 그렇게 되었다.

자막 편집자는 2020년 11월9일 충남 홍성의 식당에서 음식을 테이블로 나르는 로봇을 소개하는 기사에 “감염 걱정 덜고 인건비 줄이는 ‘로봇 종업원’”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영상을 보아서는 어떻게 감염 위험이 줄어든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AI 로봇 종업원’ 등장… 장애물도 자동 회피”라는 자막은 로봇의 가능성을 꽤 높이 평가했다. 게다가 “1번 충전에 16시간 가동… 인건비 대폭 절감”이라는 자막과 함께 종업원이 넷에서 둘로 줄었다는 사장님 인터뷰를 보니 대단한 변화가 있는 듯했다.

‘로봇’이라는 단어가 나오지는 않지만 유튜브가 알아서 찾아준 올해 5월1일 기사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편집자는 충남 당진에서 ‘자동직진 이앙기’라는 이름표를 단 기계가 모내기하는 장면에 “자율주행 이앙기 시연”이라고 설명을 달았다. ‘자동직진’을 ‘자율주행’이라는 더 거창한 말로 바꿔 부른 것은 “무인 농업 ‘성큼’… 비용·인력 ‘절감’”이라는 기사 제목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일 테다. 편집자가 기술 개발자의 주장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 그래도 상당히 공감하긴 했을 것이다. 자율주행 이앙기를 쓰면 원래 두 사람이 하던 모내기를 한 사람이 할 수 있다는 기자의 설명은 “기계 이앙 작업 대비 인건비 50% 절감”이라고 요약해주었다.

이틀 뒤인 5월3일 기사에서 자막 편집자는 로봇이 인건비만 줄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안전도 지켜준다는 점을 강조했다. “‘AI 로봇에 맡겨요’ 공동구 안전 관리”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기사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이 개발한 로봇이 통신, 가스, 전력설비가 깔린 지하 공간을 다니면서 화재 위험을 감지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 편집자는 이 시스템이 지하 공동구 공간을 온라인에 구현해 놓고서 위험을 사전에 예측하고 분석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디지털 트윈’ 기술 적용… 가상공간서 안전 관리”라고 자막을 달았다.

이제 나는 지난 일요일인 5월30일 뉴스를 만들면서 편집자가 느꼈을 당혹감 혹은 배신감을 상상해본다. 그는 2분이 채 되지 않는 주말 사건사고 뉴스 한 꼭지에 자막을 다섯개나 달았다. “‘화장실 간 동료 돕다’ 로봇에 끼어 참변”, “로봇설비에 짓눌려 30대 외국인 노동자 숨져”, “경찰, 작동 오류 등 여러 가능성 놓고 조사”, “노동부, 로봇 설치 공정 전체에 작업중지 명령”, “자동차 부품공장서 로봇설비 사망사고 되풀이”. 이 편집자가 지난 몇달 동안 로봇이 있으면 인건비를 절반으로 줄일 수 있고 대형 사고를 막을 수 있다는 자막을 달았던 사람인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충남 아산에서 전해진 로봇 사고 뉴스를 편집하는 그의 마음이 무척 서늘했다고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그는 로봇에 대한 약속과 기대를 옮길 때 쓰던 따옴표를 없애고, 즐겨 쓰던 줄임표도 없이, 마치 자막 달기 교과서에 나올 예시처럼 간결하고 건조하게 사실을 정리했다.

로봇은 종종 우리의 기대를 배신하고, 특히 뉴스 자막 편집자를 곤란하게 만든다. 현장을 취재한 기자의 설명에 따르면 로봇은 인간의 인건비나 안전에는 관심이 없는, 그저 무겁고 무서운 기계였다. “A씨는 팔처럼 생긴 로봇설비가 철판을 내려놓은 뒤 용접 등의 작업을 마치면 꺼내는 작업을 맡았는데, 작업이 끝난 철판을 A씨가 꺼내려는 도중에 로봇이 또 다른 철판을 내려놓는 바람에 끼임 사고를 당한 겁니다.” 로봇 덕분에 두 사람 일을 한 명이 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둘 중 하나가 화장실 간 사이에 로봇이 몸을 짓눌렀다. 로봇은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고 사고에 대응하지도 못했다. 편집자 잘못이 아니지만, 로봇 뉴스 자막은 모순에 빠졌다. 우리에게 로봇이란 무엇일까. ‘4차 산업혁명 특별시’라는 대전의 한 방송국에서 뉴스를 편집하는 이들은 다음 로봇 뉴스에 어떤 자막을 달아야 할까.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이대로 3년 더 갈 수 있다는 오만과 착각 [아침햇발] 1.

이대로 3년 더 갈 수 있다는 오만과 착각 [아침햇발]

목련이여, 한동훈을 잊어다오 [유레카] 2.

목련이여, 한동훈을 잊어다오 [유레카]

권력누수 대통령의 외교욕심이 무섭다 [세상읽기] 3.

권력누수 대통령의 외교욕심이 무섭다 [세상읽기]

출발 나흘 앞 갑작스러운 국빈방문 연기, 설명도 없다 [사설] 4.

출발 나흘 앞 갑작스러운 국빈방문 연기, 설명도 없다 [사설]

[홍세화 칼럼] 마지막 당부: 소유에서 관계로, 성장에서 성숙으로 5.

[홍세화 칼럼] 마지막 당부: 소유에서 관계로, 성장에서 성숙으로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