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봉ㅣ책지성팀 선임기자
시인들이 좋아하는 시인이 있다. 독자적인 어조와 발성법으로 후배 시인들에게 추종과 모방의 대상이 되는 시인들. 백석과 김수영이 대표적이지만, 김수영과 마찬가지로 올해 탄생 100년을 맞은 김종삼 역시 ‘시인들의 시인’ 명단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그 자신은 “나는 시인이라고 자처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며 겸양을 표하기도 했지만, 그의 시는 후배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정희성 시인은 “그의 마니아들이 확실히 있다. 그러나 아직도 그의 시대는 오지 않았다”고 쓴 바 있는데, 김종삼 시를 특히 아끼고 사랑하는 ‘마니아’ 중에는 현역 시인들이 유난히 많은 듯하다.
김종삼 시의 매력은 어디에 있을까. 동갑내기 시인 김수영과 비교해 보자면, 그의 시는 음성이 낮고 여백이 많다는 특징을 지닌다. 그의 잘 알려진 시 중에 ‘묵화’라는 짧은 작품도 있거니와, 김종삼의 시는 먹으로 그린 그림처럼 담박하고 은은한 분위기를 풍긴다. 김수영이 자유와 사랑과 혁명을 소리 높여 외친다면, 김종삼은 슬픔과 자비와 평화를 “되풀이하여 조용히 조용히 말”(‘앞날을 향하여’)한다. 유고작으로 제목 없이 발표된 시에서 “나는 이 세상에/ 계속해 온 참상들을/ 보려고 온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할 때, 김종삼은 그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세계의 참상을 고발한다고 할 수 있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북치는 소년’ 전문)
‘묵화’와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시의 첫 구절 “내용 없는 아름다움”은 김종삼 시의 미학을 담은 표현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김종삼의 시가 이념이나 현실 같은 ‘내용’을 배제한,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식의 오해다. 김수영의 시들에 보이는 4·19 혁명의 흥분과 5·16 쿠데타 뒤 좌절과 환멸을 김종삼에게서는 찾기 어렵다. 1984년에 졸한 그가 80년 광주 학살에 관해 언급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가 남긴 시 200여 편을 통독하면 그는 동료 인간들의 가난과 고통과 죽음에 그 누구보다 예민한 촉수를 뻗고 있음을 알게 된다.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 균일상 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장편 2’ 전문)
“1947년 봄/ 심야/ 황해도 해주의 바다/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 사공은 조심 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민간인’ 전문)
이 시들에서 김종삼이 식민 지배와 분단을 대놓고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의 커다란 흐름 속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크게 상처받고 희생되는 작은 존재들의 아픔을 그는 외면하지 못한다. ‘민간인’에서 영아를 삼킨 바다의 수심이란 달리 말해 분단 역사의 부조리한 심연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북치는 소년’에서 서양 나라의 크리스마스 카드가 하필 “가난한” 아이에게 온다는 설정은 단지 무심한 수사나 클리셰라고만 볼 수는 없다. “나의 본적은 인류의 짚신이고 맨발이다”(‘나의 본적’)라는 그의 선언은 그대로 ‘짚신의 시학’이요 ‘맨발의 시학’이라 하겠다.
“희미한/ 풍금 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아닌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물통’ 부분)
목마른 인간에게 물 몇 통을 길어다 주는 일이란 결코 보잘것없는 행위가 아니다. “살다보면 자비한 것 말고 또 무엇이 있으리”(‘유성기’)라고 시인은 다른 시에서 말하는데, 이런 자비행이야말로 삶의 기적과 기쁨을 가능하게 한다. 김종삼의 시를 읽으며 우리가 평화와 위안을 얻고 마음이 깨끗해진다면 그것은 그의 시 세계를 관류하는 인류애와 연민, 그리고 개인적 불우와 사회적 비참에도 불구하고 그가 끝내 놓지 않은 근원적 낙관 때문일 것이다.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어부’) 그는 독자에게 나직하지만 끈질기게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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