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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누구든 언제든 방관자가 될 수 있다

등록 2021-06-09 18:43수정 2021-06-10 11:37

9일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에 마련된 이아무개 중사의 분향소에서 조문객이 조문하고 있다. 이 중사는 지난 3월 선임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며 신고한 뒤 두 달여 만인 지난달 22일 숨진 채 발견됐다. 연합뉴스
9일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에 마련된 이아무개 중사의 분향소에서 조문객이 조문하고 있다. 이 중사는 지난 3월 선임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며 신고한 뒤 두 달여 만인 지난달 22일 숨진 채 발견됐다. 연합뉴스

[편집국에서] 석진환ㅣ사회부장

아주 오래전 어느 날, 한 지인이 나직한 목소리로 면담을 요청해왔다. 그는 늦게까지 이어진 술자리에서 자신이 겪은 성추행 사건을 이야기했다. 당시 상황과 사실관계, 그리고 앞으로 취할 수 있는 몇가지 방안에 관해 자신의 생각을 말한 뒤 내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첫 면담 이후 몇번의 조심스럽고 은밀한 상의가 있었고, 피해자 뜻에 따라 가해자에게 모종의 후속 조처가 조용히 취해졌고 사건은 일단락됐다.

그가 처음 내게 의견을 물었을 때 뭐라고 답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 홀로 매우 당황하고 초조했던 기억만은 선명하다. 피해자와 그런 상담을 하게 된 게 처음인데다, 나 자신도 성추행 사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요즘 말로 ‘매뉴얼’이 있는지 알아볼 생각도 못 했다. 그저 ‘너의 의견을 존중한다’ ‘너의 뜻대로 대신 나서주겠다’ 정도의 소극적 태도였던 것 같다. 정작 그의 상처와 고민을 살피고 위로한 건 다른 친구의 몫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그때의 후속 조처가 적절했는지도 자신이 없다. 꽉 막히고 답답한 상황에서 피해자는 어쩔 수 없는 최소한의 선택을 한 건 아니었을까. 모를 일이다.

공군 부사관 이아무개 중사의 극단적 선택을 둘러싼 여러 뉴스를 전하면서, 고인의 상사들이 보였던 태도가 유독 돌부리처럼 가슴에 박힌 것도 그때의 기억 탓인 듯하다. 그때 안절부절못했던 내 마음속에도 실은 ‘왜 하필 내게…’라는 회피의 단어가 맴돌았던 건 아니었을까.

81일이라는 그 긴 시간을 새삼 곱씹어봤다. 이 중사가 성폭력 피해 보고를 한 3월2일부터, 그가 홀로 쓸쓸하게 세상을 등진 5월22일까지. 그 지옥 같았을 81일을 이 중사는 어떤 마음으로 견뎠을까.

이 중사의 직속상관이었던 상사, 팀장 격이었던 준위, 그 위로 부대를 통솔하는 대대장, 비위를 조사하고 처벌해야 할 군사경찰 대대장, 그리고 그들보다 더 위에 있던 지휘관들. 이들 모두 그 긴 시간 동안 ‘왜 하필…’이라고 억울해하며 피해자를 회유하고, 주변 입단속을 시키며, 사건을 축소해 덮으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81일간 지속된 이 기막힌 집단 타살극의 책임이 이들에게만 있진 않을 것이다. 이 중사의 성폭력 피해 사실을 알았던 동료들, 고충상담에 나섰던 이들, 보고와 수사를 지연하는 걸 모른 체한 이들, 이 모든 방관자들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 중사 사건이 방치되던 기간에 지휘계통 누구라도, 수사기관의 누구라도, 하다못해 주변 동료 누군가라도 문제를 제기하고 이 중사와 연대했다면 어땠을까. 동료나 상사 중 1명이라도 진심으로 이 중사의 고민을 듣고 상처를 어루만졌더라면 극단적 선택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말이다.

아침마다 집 앞에 놓인 신문뭉치를 보며 예전에 이런 표현을 쓴 적이 있다. “어떨 땐 신문이 온통 세상을 떠난 이에게 갚아야 할 두툼한 빚문서처럼 보일 때가 있다.” 요 며칠 신문을 보며 우리 사회가 이 중사에게 갚아야 할 빚이 점점 쌓여가는 걸 느낀다. 이 중사 사건은 떨어져 죽고, 깔려 죽고, 끼여 죽었던 이들의 비극보다 어쩌면 더 참혹한 사건일 수 있다. 산업재해로 떠난 이들의 주변 동료들은 적어도 이 중사의 주변인들만큼 죽음을 외면하거나 방치하지 않았다. 주범과 종범뿐 아니라 내버려두고 따돌렸던 방관자들이 갚아야 할 빚의 크기가 작지 않은 이유다.

이번엔 군에서 일이 벌어졌지만, 다음엔 또 어디에서 우리에게 빚문서를 보낼지 모를 일이다. 학교에서, 연구실에서 또 어떨 땐 교정시설이나 보호시설에서 끊임없이 빚문서는 송달된다. 미성년 아이들이 보내기도 하고, 이주노동자나 장애 여성들이 보낼 때도 있다. 그리고 누구든 언제든 그들에게 방관자가 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이 중사에게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을까. 나는 방관자가 되지 않고 그 옛날보다는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을까. 아무리 빚테크 시대라지만, 이런 악성 채무는 이제 그만 쌓았으면 싶어 자꾸 질문이 꼬리를 문다. soulf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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