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시위대가 국제 여성의 날을 맞은 8일 수도 마닐라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유가가 급등한 것을 비판하면서 전쟁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마닐라/ EPA 연합뉴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3일째를 맞는 8일에도 우크라이나에선 러시아의 무자비한 공격과 우크라이나인들의 결사 항전이 계속되고 있다. 이번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벌어진 가장 큰 전쟁이기도 하지만, 미국 주도의 유례없는 러시아 경제제재로 ‘경제 전쟁’의 성격도 강하게 띠고 있다. 러시아가 사실상 세계경제와 단절되는 처지로 내몰리면서 세계 경제는 물론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 경제에도 상당한 후폭풍이 몰아쳐 오고 있다.
우리나라도 참여하고 있는 이번 경제제재는 주요 첨단 제품의 수출 통제라는 전통적인 제재에다 러시아 주요 은행의 국제결제망(SWIFT) 퇴출, 주요국 은행에 예치된 외환보유고 동결 같은 고강도 금융제재까지 동원돼 매우 강력하고 포괄적인 조처로 평가된다. 경제제재 여파로 러시아 루블화는 최근 2주간 약 53% 폭락했으며, 러시아 증시는 침공일 이후 계속 폐장됐다. 국제 신용평가사들이 러시아 국가신용등급을 투기등급으로 강등하면서 러시아가 디폴트(채무 불이행)에 빠질 가능성까지 나오고 있다. 여기에다 미국이 7일 러시아 원유 금수 조처를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전해지면서 국제유가는 한때 배럴당 130달러를 돌파해 ‘제3차 오일 쇼크’ 우려까지 나왔다. 독일 등 일부 유럽 국가들이 반대하면서 국제유가는 8일 하락했으나 앞으로도 큰 변동성을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대해 러시아는 7일 한국을 포함한 제재 이행 국가들을 ‘비우호 국가’로 지정하는 등 보복에 나섰다. 비우호국가로 지정되면 외화 송금 한시적 금지, 대외 채무의 루블화 지급, 기업 간 거래 사전 승인 등 제재가 부과된다.
이번 사태는 유라시아의 지정학적 요충지에서 전쟁이 벌어진 점, 그리고 주요국의 경제제재 강도가 앞으로 더 높아질 수 있는 점 등 때문에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클 것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다만 세계 11위 경제 규모에 원유·천연가스 등 에너지와 원자재 수출 대국이기도 한 나라에 이런 강도 높은 경제제재가 부과된 것은 사실상 처음이어서 그 여파가 어느 정도나 될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마치 2008년 미국계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파산의 후폭풍을 연상케 한다. 당시 리먼브러더스 파산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주요 국가들로 전이되면서 글로벌 경제위기가 발생했다. 만약 러시아가 디폴트 상태에 빠진다면 누가 위험에 노출돼 있는지 알 수 없어 불확실성이 극도로 커질 수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땐 주요국 정부와 중앙은행들이 확장적 재정·통화 정책으로 경기 방어에 나섰지만, 지금은 이미 코로나 대응에 재정·통화 여력을 소진한 데다 인플레이션까지 겹친 상황이라 대응 수단도 마땅치 않다. 또한 당시엔 중국이 세계경제의 ‘구원투수’로 나선 바 있지만, 지금은 중국도 그럴 처지가 못 된다. 가장 직접적인 위험에 노출된 유럽에선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우리 경제도 그 충격을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특히 우리 경제는 대외 무역·에너지 의존도가 매우 높은 경제 구조를 가진 터라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상당한 충격이 예상된다. 유가와 원자재 가격 상승이 국내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면 가계 소비와 기업 투자가 움츠러든다. 또한 세계경제 위축으로 수출이 둔화하면 경상수지도 악화된다. 우리 경제는 이미 고물가·고금리·고환율의 ‘신 3고 현상’ 부담을 안고 있는데, 경기 침체까지는 아니지만 경기 둔화와 물가 상승이 동시에 나타나는 ‘슬로플레이션’이 올 수 있다. 정부는 이번 사태가 에너지·원자재 수급과 금융시장, 그리고 거시경제 전반에 미치는 악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총력 대응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