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15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잔디마당에서 열린 제77주년 광복절 경축식에 참석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정의길 | 국제부 선임기자
한 재벌 총수는 유난히 ‘감옥행’이 잦았다. 그가 수사기관에 불려갈 때마다 그 기업의 임원들은 여론 무마나 사법 대처에 몸살을 앓았다. “뭔 고생이냐”고 물어보자 한 임원은 “괜찮아요, 이런 사태 때문에 우리들의 존재 가치가 증명되는데요”라며 체념을 넘어서 달관을 한 듯 답했다.
신세계그룹의 총수인 정용진 부회장이 중국 등을 겨냥해 ‘멸콩’ 챌린지 등 극우적 언행을 이어간 사례가 대표적이다. 기업에 있는 사람이 정 부회장의 언행을 어이없어 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다. 대선 기간에 윤석열 당시 후보가 정 부회장의 멸콩 챌린지에 화답해, 멸치와 콩을 마트에서 쇼핑하는 모습을 소셜미디어에 떡하니 올리는 것을 보고 ‘대통령 리스크’를 감지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이상할 것이다.
멸콩 챌린지에 호응한 윤 후보는 ‘사드 추가 배치’라는 한줄 공약을 소셜미디어에 이어갔다. 이에 앞서 그는 강연에서 “한국 국민들, 특히 청년들의 대부분은 중국을 싫어한다”는 말도 했다.
이런 언행을 한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지난 20년간 우리가 누려왔던 중국을 통한 수출 호황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최상목 대통령실 경제수석), “세계가 존중하는 가치를 추구하는데, 중국이 경제적으로 불리한 행동을 한다면, 옳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한덕수 국무총리) 등 윤 정부의 고위 인사 발언들이 이어졌다.
중국 포위를 목적으로 열리는 나토 회의에 참석하면서 굳이 탈중국 수출다변화를 표현해야 하는 건지, 아직 현실화되지도 않은 중국의 경제보복에 미리 ‘맞짱 뜨자’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외교적으로 현명한지 모르겠다. 대통령이 반중적인 인식을 보였으니 참모들이 따라가는 것을 당연하다고 봐야 하나, 아니면 참모들이 대통령의 언행을 ‘마사지’ 못 하는 것을 개탄해야 하나?
대통령과 참모들의 이런 언행에는 비용이 뒤따르게 된다. 사드 배치를 그렇게 명확하게 얘기했으니, 중국으로선 설사 사드 문제를 꺼내고 싶지 않았어도 꺼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만 방문으로 국제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킨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방한했을 때 윤 대통령이 그와의 만남을 놓고 오락가락한 것은 결국 사드 문제 등 일련의 중국 자극 발언의 후폭풍이 아닐 수 없다. 한-중 외교장관 회담을 앞두고 한국으로서도 중국에 성의를 보이려는 것이었을 텐데 ‘굴욕 외교’라는 말이 윤 대통령 지지층에서 터져나왔다.
한국 대통령이 방한한 미국 하원의장을 만날 수도 있고, 안 만날 수도 있다. 미묘한 시기라면, 접견 여부를 극히 로키로 처리하면서 일관된 입장을 보여줘야 외교적 파장이 줄어든다. 펠로시를 ‘안 만난다’, ‘만난다’, ‘만나는 일정조차 조율 안 했다’라고 하다가 결국 전화통화로 귀결되는 과정은 중국과 미국 모두에 우습게 보이는 최악의 결과를 만들었다.
사드 하나로 중국 안보가 결정적으로 위협되거나, 한국 안보가 획기적으로 신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군사안보 전문가들이라면 잘 알고 있다. 그런 사드가 새롭게 출범한 한국 정부와 중국의 첫 외교장관 회담의 주 의제가 되는 것은 두 나라 모두 원치 않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박진 외교장관과 왕이 중국 외교부장의 첫 만남은 중국이 사드를 놓고 ‘3불 1한’ 지침을 발표해 사드만이 부각됐다. 중국의 오만이 크지만 그것만 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한국은 지금 4강의 압박 속에 안보·외교 위기로 빨려들고 있다. 미국은 중국과의 대결에서 한국이 올인하라고 압박한다. 이와 관련해 중국은 한국의 일거수일투족에 대응하고 있다. 일본은 강제동원 등의 문제를 놓고 한국이 먼저 항복하고 나서라 한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한 제재에 동참한 한국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했다. 북한은 코로나19 감염까지 한국 책임이라며 핵실험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물론 윤석열 정부의 책임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열강이 조성한 국제정세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신중하고 균형 잡힌 능력이 절실하다.
그런데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윤 대통령은 ‘칼퇴근’한 아파트에서 전화 지시로 논란을 야기하고, 아침저녁으론 한국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미군기지를 거쳐 출퇴근하며, 안보 위기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지 의구심을 키운다. 철없는 재벌 3세와 동급으로 처신하지 말고, 이제라도 언행에서 ‘외부 총질’을 거두고 리스크를 키우지 않는 자중자애를 정말 부탁한다. 미우나 고우나 그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대통령이다.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