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신세계그룹이 세금을 내고 떳떳하게 경영권을 승계하겠다고 밝혔다. 구학서 신세계 사장은 “깜짝 놀랄 만한 수준의 상속이 있을 것”이라며, 사전 증여와 상속을 통해 낼 세금은 1조원 이상이 될 것이라고 했다. 실천으로 이어져 재벌의 ‘세금 없는 대물림’ 고리를 끊는 선례가 되길 기대한다.
어떤 논의 과정이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신세계 쪽에선 이명희 회장이 지난해 말에 지시한 것이라고 한다. 삼성과 현대차그룹이 경영권 편법승계 문제로 곤욕을 치르고, 신세계도 경영권 편법 대물림 논란에 휩싸이자 더 이상 선택 여지가 없어 나온 결정이라는 관측도 있다. 어떻든 중대한 변화임엔 틀림없다. 신세계와 비슷한 고민을 해온 다른 재벌도 이젠 결심을 해야 할 때가 됐다. 그룹마다 상속세가 경영 구도에 끼칠 영향에 차이가 있겠지만 편법 경영권 승계가 더는 자리잡을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삼성이나 현대차가 해오던 식으로는 적법성도 사회적 정당성도 얻을 수 없는 시대가 됐다.
마침 삼성그룹 고위 임원도 “이건희 회장의 아들 재용씨가 1조원 이상의 상속세를 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금액이 적절한지는 따져 봐야겠지만, 이 역시 변화하는 흐름을 반영한다.
대세가 이런데도 전국경제인연합회나 일부 언론은 여전히 과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듯하다. 상속세를 제대로 내면 후세에 기업을 물려줄 수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으나, 기업을 기업주의 사유물로 보는 구시대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재산과 함께 경영권도 당연히 세습돼야 한다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경영권은 수많은 주주와 이해관계인한테서도 위임받은 것이다. 후세가 경영 능력이 있어 위임을 다시 받으면 모르되, 그가 당연히 세습받아야 할 몫은 결코 아니다.
기업인의 경영권 승계 고민을 덜어주기 위해 상속세율을 낮추거나 폐지해야 한다는 건 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상속세는 기업인뿐 아니라, 상속할 재산이 있는 모든 국민에 해당하는 조세다. 전체 영향을 살펴 다룰 일이지 경영권 승계만을 위해 고칠 사안이 아니다. 상속세 폐지가 세계적 흐름인 양 호도하는 건 더더욱 옳지 못하다. 이런 주장을 펴기에 앞서, 지금은 기업으로 하여금 잘못된 대물림 관행을 고치고 신뢰 기반을 쌓게 하는 데 힘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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