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8월 일본의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의 탐구욕을 높이기 위한 방책의 일환으로 교사가 학생을 일대일로 가르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 초·중·고 ‘여유있는 교육’ 시행3년만에 “휘청” 국제평가 순위 떨어지자 부모들 불만 폭발
문부상 수업시간 확대 심의요청 논란 점화
“학습량보다 방법이 문제” 반론도 만만찮아 기초지식이냐,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냐? 일본에서 어린이들의 종합적 사고 함양을 내세운 ‘여유있는 교육’이 대전환의 갈림길에 섰다. 지난해 말 발표된 독해력·수학·이과 등의 국제비교에서 일본 청소년들의 순위가 떨어진 게 부모들의 불만을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됐다. 이어 나카야마 나리아키 문부과학상이 지난주 교육 방향을 결정하는 중앙교육심의회(중교심)에 수업시간과 학습량 증가에 대한 심의를 요청함으로써 논란이 본격 점화됐다. ◇ 힘받는 개편론=여유있는 교육은 살인적 입시경쟁과 주입식 교육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다. 1998년 새 학습지도요령 고시를 거쳐 2002년 초·중학교, 2003년 고등학교에 도입됐다. 주 5일 수업제에 발맞춘 수업시간과 교과내용의 감축, 교과 경계를 넘어 체험을 위주로 한 종합학습 신설이 뼈대다. 새 제도 도입으로 줄어든 기초과목 수업시간과 양은 15% 안팎이다. 이것을 이전처럼 늘릴 것인가가 논란의 초점이다. 문부성은 사회흐름과 맞물려 있는 주 5일제는 되돌리기 어렵다고 보고 종합학습과 선택교과를 ‘정조준’하고 있다. 문부성 관계자는 “종합학습의 시간을 줄여 기초과목에 충당하고, 줄어든 종합학습은 여름방학 때 하는 방안도 하나의 선택지”라고 말했다. 교육당국의 발빠른 움직임에는 학교에서 너무 공부를 시키지 않는다는 학부모와 자민당·재계의 불만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여유있는 교육이 도입될 때에도 반대가 적지 않았지만, ‘살아 있는 교육’이 더욱 중요하다는 견해가 우세했다. 그러나 학력저하와 관련된 조사들이 잇따르면서 추세는 역전됐다. <요미우리신문> 여론조사에선 1999년 여유있는 교육에 대한 찬성이 58%로 반대(36%)를 앞섰으나, 최근에 반대가 72%로 찬성(22%)을 크게 웃돌았다. 며칠 전 <아사히신문> 조사에서도 여유있는 교육이 “실패했다”는 응답이 60%를 차지했다.
나카야마 문부상은 여유있는 교육의 최대 문제점으로 “어린이들에게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교사에게 그만큼만 가르치면 된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줄 수 있다”는 점을 꼽고 “기초를 철처히 배우려면 반복학습이 필요한데 학습시간을 줄인 게 큰 문제”라고 말했다. 중교심은 바꿀 것은 빨리 바꾸겠다는 방침이어서 이르면 올 가을께 방향이 결정될 전망이다. ◇ 만만찮은 반론=먼저 여유있는 교육에 ‘직격탄’을 날린 국제평가가 새 제도에 따른 학력저하를 입증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들 평가가 실제 이뤄진 시점은 2003년으로, 여유있는 교육이 실시된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리이 야스히코 중교심 회장은 “학력저하란 장기간에 걸쳐 일어나는 것이므로 종합학습과 학력저하를 곧바로 연결짓는 것은 성급한 일”이라고 말했다. 국제평가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나타낸 핀란드의 학습시간이 일본과 비슷하다는 점도 반론에 힘을 실어준다. 일선학교에선 새 제도가 도입된 지 얼마되지 않아 전체 틀을 바꾸려는 데 대해 ‘오락가락 교육행정’이라는 비판이 적지 않으며, 주입식 교육이나 그에 따른 등교거부 등의 부작용이 되살아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여유있는 교육의 근간이 마련된 1998~99년 문부상을 지낸 아리마 아키토 전 도쿄대 총장은 학교현장에서 여유있는 교육을 오해하고 있는 측면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수업시간이나 학습량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학습결과를 살아 있는 지식으로 만들어나가는 교육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긴요하다”고 지적했다. 과학과목을 예로 들면, 일본에선 1970년대 지금보다 거의 2배 가까이 수업시간이 많아 당시 중학생 과학실력이 세계 1, 2위를 다퉜다. 그러나 이들이 어른이 된 90년대와 2000년대의 각국 국민을 대상으로 한 과학지식 조사에선 일본이 14~16개 선진국 가운데 13~14위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어릴 때 지식량만 늘린 게 자라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도쿄/박중언 특파원 park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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