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이종욱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이 그제 뇌경색으로 타계했다. 한국인 최초의 유엔 전문기구 수장이자 평생을 지구촌 질병 퇴치에 헌신해 온 이였다. 연례 총회 준비 중 과로로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니 안타까움과 애통함이 더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3년 전, 그의 총장 피선은 이변이었다. 처음 출사표를 던졌을 때만 해도 국내 여론은 뜨악했다. 국제적인 지명도가 낮다는 이유에서다. 국가간 힘겨루기와 정치적 타협 관행, 거물급 경쟁자 등 모든 여건이 불리했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그의 헌신적인 삶과 뛰어난 행정 능력에 표를 던졌다. 고인은 안락한 삶을 버리고 태평양의 한 작은 섬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돌봤고, 세계보건기구에서 20년 넘게 에이즈와 결핵, 소아마비 확산 저지에 온몸을 던졌다. 소아마비 유병률을 크게 떨어뜨려 ‘백신의 황제’로 불렸고, 강한 업무 추진력은 ‘소리 없는 천둥’이란 별칭을 가져다줬다.
그의 급서 소식에 유엔은 만국기 조기를 달아 깊은 슬픔을 표했고, 각국 지도자들은 “지구촌의 공복을 잃었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고인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국제사회의 애도 행렬은, 무심한 국내 분위기를 질타하는 목소리 같아 오히려 부끄럽다.
정부의 대응은 더 한심하다. 고인의 국내 분향소는 애초 서울대 의대 회관에 설치하려다 어제 오후 외교안보연구원으로 옮겼다. 동창회 차원에서 추모객을 맞는다는 사실을 안 유족들이 정부 차원의 분향소를 소원해 부랴부랴 바뀐 것이다. 외국에서 국가 원수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국제기구 수장에 대한 이런 예우는 유족에 대한 무례이자 국제적 망신이다. 국제기구 공무원 빈소를 설치한 전례와 규정이 없다는 당국의 해명은 옹색하다. 현직 외교부 장관이 유엔 사무총장 진출을 공언한 나라의 수준과 인식이 이 정도라면 국제적 망신을 사고도 남는다. 뒤늦게 훈장을 추서한다고 호들갑을 떨기 전에 국제 외교의 기본부터 되돌아볼 일이다.
고인은 생전에 “대외원조 확대가 바로 국익”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대외원조액은 선진국의 경우 국내총생산의 0.7%까지 내자는 게 국제사회의 합의다. 그러나 우리는 0.01% 안팎, 자발적인 국제기구 기여금은 정규 분담금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국제사회에 큰 발자취를 남긴 그의 죽음이 더욱 애석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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