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의 손녀인 허로자씨가 어제 정부 초청으로 모국 땅을 밟았다. 13도 연합 창의군을 이끌고 일제 통감부를 공격하기 위해 ‘서울진공작전’을 펼쳤던 할아버지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생을 마친 지 98년 만이다. 친일 행각을 했던 이들과 그 후손은 이 땅에서 큰소리 치며 살았는데, 애국지사 손녀에게는 조국이 그토록 멀고 야속한 나라였다. 우리가 무심했던 탓이고 미안할 따름이다.
지난달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한 한명숙 국무총리를 만나 그가 했다는 말이 다시금 가슴을 저민다. “나는 이전 것은 모두 잃어버리고 살았고, 더 어떻게 할 계획도 없던 사람이었다.” 회한이 뚝뚝 떨어진다. 할아버지와 아버지(허형)는 나라를 위해 싸웠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아픔과 고단한 삶이었다. 조국 정부도 찾지 않았다. 고려인돕기운동본부 등 뜻있는 민간단체가 없었더라면 조국은 끝내 그에게 이국으로 남았을지 모른다.
팔순의 허씨는 남은 삶을 한국에서 보내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그럴 권리가 있다. 정부도 그에게 ‘특별귀화’를 허용하는 방안을 강구 중이라는데 마땅히 그래야 한다. 우리 국민이 그에게 진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더는 길이다.
‘친일 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가 발족돼 친일파 재산 환수 작업도 진행되고 있다. 광복 후 60여년간 하지 못했던 친일 청산 노력이나,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애국지사와 후손도 진정한 평가를 받을 때 역사 바로 세우기와 국가 정체성도 온전해진다. 그럼에도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조국을 들르지 못하는 애국지사 후손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고 한다. 허씨의 방한이 이들에 대한 관심을 새로이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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