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미국의 이라크 정책 전환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될 듯하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중간선거 패배 직후 강경파인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을 경질하고 로버트 게이츠 전 중앙정보국장을 후임으로 지명한 게 그 시작이다. 이라크 점령 실패를 전술적으로 보완하는 땜질식 처방이 아니라 일방주의 정책 기조를 포기하는 근본적 전환이 되길 바란다.
정책 변화 방향은 대통령 자문기구인 이라크연구그룹이 곧 제출할 전략 수정안에 잘 나타난다. 지난봄 설치된 이 10인 위원회에는 게이츠 지명자도 참여해 왔다. 수정안으론 이라크 주둔 미군을 외곽으로 철수시키되 필요지역에 집중 투입하는 ‘배치 전환 및 봉쇄안’과 저항세력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이고 이란·시리아 등 주변국을 참여시켜 이라크를 안정화하는 ‘안정화 우선안’ 등이 꼽힌다. 모두 단계적 미군 철수를 전제로 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이라크 사태가 개선되긴 어려울 것이다. ‘이라크인의 이라크 문제 해결’이라는 원칙이 자리잡아 이 나라가 안정되려면, 먼저 이라크를 중동 민주화의 본보기로 만들어 중동지역 전체를 재편하겠다는 미국의 야심부터 버려야 한다.
부시 행정부의 선거 패배와 함께 미국의 ‘이라크 손떼기’는 이미 시작됐다. 앞으로 미국 안에서 철군 속도와 방법, 전반적인 정책 방향을 놓고 많은 논의가 있겠지만 부시 행정부의 중동 정책이 실패했다는 냉엄한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딱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도 자이툰부대를 철수시키기는커녕 주둔 연장을 고려하는 우리 정부다. 부도덕한 이라크 점령에 동참한 것만 해도 큰 잘못이거니와, 이라크 침공을 주도한 미국에선 이미 심판이 내려졌는데도 미국의 눈치를 보며 철군을 머뭇거리는 것은 주권국가의 모습이 아니다.
부시 행정부의 대북 정책 전환은 이라크 정책만큼 분명하진 않을 것이다. 민주당 주요 인사들이 북-미 직접대화와 주고받기식 협상을 강조하고 있으나 행정부 정책에 바로 반영되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단기적으론 이라크에 가려 북한 핵문제가 미국인의 시야에서 멀어질 수도 있다. 순조로운 6자 회담 진전을 위해 한국이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진 셈이다. 이번 미국 선거는 지구촌 주요 현안들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가능성을 높였다. 북한 핵문제든 이라크 사태든 우리 정부는 이런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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