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한국 정치의 위기 진단을 둘러싸고 학자들이 논쟁을 벌이기 시작한 지는 제법 됐다. 학문적 용어로 진행되던 이 논쟁에, 최근 노무현 대통령이 한발 디밀었다.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린 장문의 소견문에서 현실과 이론, 참여정부 실패와 진보진영의 위기, 민주세력 무능론, 지식인의 이중성 등에 대해 논쟁적인 반론을 제시한 것이다. 토론은 없고 뒷얘기만 난무하는 시절에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논쟁의 멍석은 최장집 고려대 교수(정치학)가 깔았다. 최 교수는 참여정부를 실패로 규정하고, 그 원인을 정당과 국회를 배제한 운동정치(포퓰리즘)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특단의 대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한나라당으로 정권이 넘어가는 것은 당연하다는 그의 주장은 논쟁 촉발의 뇌관 구실을 했다. 이에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사회학),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학)가 반론에 재반론을 거듭하면서 논쟁은 진보 진영 전반의 관심사로 확산됐다.
최 교수의 주장을 두고 조 교수는 정치의 무력화 때문이 아니라 보수적 제도정치권의 저항을 돌파하기 위한 대중과의 결합, 곧 진보적 민중주의 전략이 부재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반박했다. 반면, 손 교수는 당면한 위기는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추진해 온 신자유주의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며, 따라서 신자유주의를 심판하는 데 모든 역량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논쟁은 비록 참여정부의 실패를 따지는 데서 출발했지만, 진보 진영이 당면한 위기의 본질과 이를 타개하려는 전략까지를 두루 포괄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이제 논쟁은 총론에 머물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에 근거한 각론으로 확대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참여정부가 실패했다면, 구체적인 근거와 자료를 가지고 따져보자”는 노 대통령의 요구는 수용돼야 한다. 일자리·부동산 등 민생 현안, 비정규직 등 노동정책, 한-미 자유무역협정, 북핵과 한-미 동맹, 그리고 주한미군 재배치 등 각종 현안은 물론, 인사나 정치 스타일까지 논쟁은 포괄해야 한다.
이론은 구체적인 현실에서 도출된다. 현실과의 부단한 부딪침 속에서 발전하고 실천성을 갖추게 된다. 모처럼 찾아온 백화제방 기운속에서 학계·정계, 사회운동이 참여하는 광범위한 토론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그래야만 한국 정치의 새로운 비전과 이를 위한 실천적 이론, 그리고 동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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