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국민의 심판은 준엄했다. 지난 5년과 그에 앞선 5년을 집권한 세력을 아우르는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득표율은 합쳐도 당선자에 크게 못미친다. 진보·개혁의 정신을 함께하는 다른 후보들의 표를 더해도 결과는 참혹하다. 사실상 양당 체제의 붕괴다. 개혁과 보수의 두 날개 가운데 하나가 꺾인 것이기도 하다. 어느 정치세력의 실패를 떠나, 한국 사회가 앞으로 제대로 갈 수 있을지 걱정해야 할 상황이다. 이른바 범여권으로선 여기까지 이르도록 한 데 대한 통절한 반성 말고 다른 어떤 말도 앞세울 수 없게 됐다.
이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잘못을 겸허하게 되돌아봐야 한다. 잘한 일을 몰라준다고 오만하게 국민을 탓할 게 아니다. 그보다는 그동안 자신이 내건 깃발과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는지, 그에 걸맞은 정책은 갖췄는지, 또 이를 현실로 구현해낼 실력을 보였는지 반성해야 한다. ‘뽑아줘 봤자 바뀐 게 없다’ ‘더 나빠졌다’는 국민의 차가운 평가는 표로 확인됐다.
낡은 틀로는 더는 국민의 마음을 잡기 어렵다는 점도 받아들여야 한다. 구호만으로 지지를 받을 수 있던 때는 이미 지났다. 진보적 가치의 정당성을 국민한테 인정받자면 더욱 현실적이고 풍부한 정책과 비전을 내놓아야 한다. 국민이 잘살 수 있는 대안을 내놓고, 이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뢰를 아울러 얻지 못한다면 지금의 실패는 또다시 반복될 것이다.
이런 과제가 정치적 대표들만의 문제일 순 없다. 진보·개혁의 깃발에서 국민의 마음을 멀어지게 한 데는 연이은 집권에 안주해 변화와 혁신을 게을리한 여러 사회집단의 책임도 크다고 봐야 한다. 진보의 새로운 출발은 이들 모두 힘을 합쳤을 때 가능하다.
10년 만에 정권을 잃은 범여권이 지금의 괴멸적인 패배에 그대로 주저앉는다면 한국 정치는 견제와 균형을 이룰 세력을 잃게 된다. 범여권이 5년, 10년 뒤를 기약하면서 실력을 다져야 할 이유다. 내년 4월 총선에서 분열 없이 힘을 모아야 할 까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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