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송>에 이어 <문화방송>까지 정권의 나팔수로 만들려는 시도가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엄기영 사장이 전격 사퇴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문화방송의 최대 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는 어제 방송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위해 그동안 유지돼온 ‘사장의 이사 추천 뒤 추인’이라는 관행을 간단히 짓밟았다. 야당 쪽 이사들이 불참한 가운데 이사회를 열어 문화방송 보도·제작·편성 본부장을 맡을 이사진을 일방 결정한 것이다. 엄 사장을 제쳐놓고 직접 방송의 핵심을 통제하겠다는 노골적인 의사 표시다. 엄 사장이 이에 반발해 사퇴 뜻을 밝히자 방문진은 즉각 수리했다. 방문진의 이번 조처가 엄 사장을 몰아내기 위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될 만하다.
이제 방문진은 문화방송을 완전히 손안에 넣을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큰 착각이다. 문화방송 노조는 즉각 새로 뽑힌 이사들의 출근을 저지하는 한편 총파업 준비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 언론노조 한국방송본부도 성명을 내어 연대투쟁을 선언했다. 언론시민단체들도 “공영방송 편성·제작의 자율성을 훼손하는 것”이라며 이번 사태를 좌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제 문화방송을 정권의 나팔수로 만들려는 악질적 시도에 맞서 방송 독립성을 지키기 위한 싸움은 피할 수 없게 됐다.
친정부 세력이 주도하는 방문진이 문화방송을 직접 주무르게 되면, 우리의 공영방송은 모두 군사독재 시절로 퇴행할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 참모 출신 인사가 사장으로 들어선 이후 노골적으로 정부 선전에 나서고 있는 한국방송의 현실은 그 좋은 증거다. 방송의 핵심인 보도·제작 책임자가 정부 입맛대로 구성되면, 구성원들이 아무리 반발하더라도 문화방송 역시 한국방송의 전철을 밟기 쉽다. ‘피디수첩’을 비롯해 정부 쪽이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시사 프로그램들이 위기에 처할 것이고, 정부를 감시하고 비판하는 뉴스는 사라질 게 뻔하다.
정부의 방송 장악 기도는 건전한 비판을 생명으로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이나 다름없다. 정부가 민주주의를 존중한다면 문화방송 장악 기도를 포기해야 한다. 정작 물러나야 할 사람은 엄기영 사장이 아니라 김우룡 이사장을 포함한 방문진의 친정부 이사들이다. 그들이 자리를 지키며 문화방송을 직접 통제하는 한 누가 사장이 되더라도 방송의 독립성은 보장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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