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5만달러 수수 의혹은 혐의를 뒷받침할 아무런 물증도 없이, 오로지 돈을 줬다는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의 진술만 있는 사건이다. 이런 유형의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뇌물 공여자의 진술의 신빙성이다. 진술이 얼마나 일관되고 이치에 맞는지가 유무죄를 판가름하는 열쇠가 된다. 그런데 어제와 그제 열린 공판에서 곽씨가 한 진술 내용을 보면 아예 기가 막힐 지경이다. 그는 검찰의 공소장 내용을 대부분 뒤집어버렸다. 일관성은커녕 오락가락에 횡설수설투성이다. 이런 정도의 진술을 근거로 전직 국무총리에다 야당의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를 기소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곽씨는 돈을 한 전 총리에게 직접 건넨 것이 아니고 총리공관 의자에 놓고 나왔다고 말했다. 한 전 총리가 이를 봤는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돈을 받은 것은 한 전 총리가 아니라 ‘의자’인 셈이다. 2004년 4월 총선을 앞두고 한 전 총리에게 1000만원을 전달했다는 검찰 주장도 부인했다. 한 전 총리가 총리공관 오찬장에서 정세균 당시 산업자원부 장관에게 ‘곽영욱을 부탁한다’고 말했다는 공소장 내용도 뒤집었다. 오찬 당시의 구체적 정황을 묻는 질문에도 모두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잘 모르겠다”는 답변의 연속이었다. 한마디로 ‘허무 개그’ 수준이다.
상황이 이쯤 되면 도대체 검찰이 무엇을 믿고 한 전 총리를 기소했느냐는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돈을 의자에 놓고 나왔다는 진술이 어떻게 공소장에는 직접 준 것으로 기재됐는지는 철저히 따져볼 대목이다. 검찰의 강압수사 의혹도 규명돼야 한다. 곽씨는 “구치소에 돌아오면 새벽 3시가 될 때도 있었다” “무서웠다”고 말했다. 그동안 한 전 총리 쪽은 “검찰의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건강마저 좋지 않은 곽씨가 검찰의 회유와 협박을 견디지 못해 거짓 진술을 했다”고 말해왔다. 곽씨의 진술로 이번 수사가 짜맞추기 표적수사라는 주장은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됐다.
곽씨의 진술이 오락가락하면서 법조계에서는 검찰의 공소유지 자체가 힘들어졌다는 지적이 적잖다. 검찰 안에서도 유죄판결을 받기에는 이미 글렀다는 탄식이 나온다고 한다. 그렇다면 검찰은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한 전 총리에 대한 기소를 취하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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