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5시 정각, 길 가던 시민들이 얼어붙은 듯 일제히 발걸음을 멈추고 부동자세를 취한다. 거리의 스피커에서 장엄한 음악과 함께 낭독문이 울려퍼진다.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바로 국기에 대한 맹세다. 그런데 이런 과거 군사문화 잔재를 그리워하는 교육관료들이 있다.
부산시교육청은 최근 관내 초·중학교에 공문을 보내 “아침 조회 때 학생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문 낭독을 하도록 협조하라”고 지시했다. “보행 중 애국가가 들려오면 걸음을 멈추고 애국가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바르게 서서 듣는다”는 등의 구체적인 교육내용까지 예시했다고 한다. 21세기의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전체주의 문화를 강요하려 하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다.
국기에 대한 맹세는 발상부터가 난센스에 가깝다. 맹세문을 주문처럼 외우고 반복하면 애국심이 고취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럽다. 비록 2007년 행정자치부가 맹세문의 문구 일부를 수정했다고는 하지만 본질은 달라진 게 없다. 국기에 대한 맹세가 요즘에는 뜸해져 정부 공식 행사 따위에서만 제한적으로 실시되는 것도 이런 인식이 확산됐기 때문이다.
부산시교육청 관료들에게 묻고 싶다. 본인들은 과거 국기에 대한 맹세를 강요당하면서 가슴속에 애국심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는가. 그래서 지금 학생들을 닦달하면 애국심이 함양된다고 진정으로 믿는 것인가. 오히려 교육청의 이번 조처에서는 교육관료들의 전형적인 ‘한건주의’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이명박 정부 들어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는 과거회귀주의 흐름에 편승해 자신들도 뭔가 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강박관념이 느껴진다.
월드컵 때 거리를 가득 메운 ‘붉은 물결’에서도 확인됐듯이 지금 자라나는 세대들의 국가관은 과거 세대와는 다르다. 획일적이고 박제된 애국심이 아니라 자발적이고도 생명력이 넘치는 애국심이 이들과 어울린다. 부산시교육청은 “학생들이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국가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았다”고 했으나 이런 진단부터가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충성서약서 따위로 청소년들을 옭아매려는 낡은 방식은 이제 통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교육계는 지금 교육비리 문제로 떠들썩하다. 애국심에 관해 정신을 차려야 할 사람은 학생들이 아니라 바로 교육관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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