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주총 시즌이다. 매년 이맘때 기업들은 정기 주주총회를 열어 한 해 동안 거둔 성적표인 재무제표와 임원 선임, 정관 변경 같은 사안을 논의하고 승인 여부를 결정한다. 12월 결산법인들은 한날한시에 요식행위처럼 주총을 연다. 안건 처리도 일사천리다. 주총일은 매번 정해져 있다. 올해는 3월 둘째, 셋째, 넷째 주 금요일이다. 지난 11일 52개사를 시작으로 18일에는 225개사가 한꺼번에 주총을 열었다. 오는 25일에는 367개사가 또 무더기 주총을 예고하고 있다.
수백개 회사들이 한날 동시에 주총을 뚝딱 해치우는 이유는 뭘까. 부적격 이사 선임이나 과다한 보수 한도 따위의 논란으로 표 대결이 예상되는 기업일수록 이런 몰아치기 경향이 강하다. 골치 아픈 주주 참여를 제한하고 반대 의결권도 무력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귀찮은 일을 한 번에 몰아서 처리하려는 지극히 편의적인 발상인 것이다. 담합도 이런 담합이 없다. 일부 주주들은 “이런 게 주주 중시 정책이냐”고 따져보지만, 소수의 반대 의견은 동원된 ‘큰소리’에 묻히기 일쑤다.
올해 주총에서 기업들은 하나같이 ‘주주가치 극대화’를 외쳤다. 그래서인지 실적 악화에도 배당을 늘리는 기업들이 부쩍 눈에 띈다. 현대차는 지난해 영업이익이 16%나 줄었는데도 배당금을 33%나 늘렸다. 사상 첫 적자를 내고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진행 중인 포스코는 주주 배당액만큼은 전년 수준을 유지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순이익이 전년보다 2조원가량 줄었지만 기말 배당을 늘렸다.
기업이 이익 중 일부를 주주들에게 나눠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아가 배당을 확대하려는 것도 나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글로벌 기업들에 비해 국내 기업의 배당성향이 낮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지적돼온 바다. 기업 내부에 이익을 쌓아두느니 주주들에게 나눠줘 소비를 진작시키는 게 낫다는 주장도 있다. 다 일리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배당의 과실은 대부분 대주주 몫이다. 실제로 그들이 소비를 늘려 내수가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더 꺄우뚱해지는 것은 기업들이 신규 사업 분야 진출을 꺼리고 신기술 개발을 위한 연구개발 투자를 줄이면서까지 ‘주주 중시’를 외치는 현실이다. 특히 적자를 내고 인력 감축에 돌입하고도 주주 배당을 늘리는 기업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최근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발표한 올해 30대 그룹의 투자 계획은 122조7천억원으로, 전년에 견줘 3.5% 줄었다. 연구개발 투자 규모는 고작 0.1% 늘었다. 30대 그룹의 연구개발 투자는 벌써 3년째 정체 상태다. 안 그래도 지금 한국 경제는 수출 급감에 제조업 경쟁력 저하로 위태로운 상황을 맞고 있다. 위기 국면에서 주주 권한만 강화하고 투자를 줄인다면 기업의 미래는 뻔하지 않겠는가.
실적 부진을 겪는 기업이 배당을 늘리면 주가를 떠받치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기업 가치에는 별 영향을 주지 못한다. 시장에선 성장 정체가 의심되는 기업의 이상 신호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배당 확대가 당장 주주들에게 득이 될 것 같지만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인공지능 알파고로 놀라운 기술력을 보여준 구글의 힘은 10여년 동안 공들인 30조원대의 투자에서 나왔다. 한미약품의 8조원대 신약기술 수출은 적자를 내면서도 매출액의 20%를 연구개발에 투자한 결과다. 지금 국내 기업들에 절실한 것은 미래 성장성이다. 주주권리 강화도 좋지만 성장 동력이 약해지고 기업 가치가 떨어지면 결국 주주들도 돌아서고 만다. 홍대선 경제데스크 겸 산업1팀장 hongd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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