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박근혜 전 대통령, 최순실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연루된 ‘국정농단’ 사건 상고심에서 김명수 대법원장이 선고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순실(최서원)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대법원이 ‘정경유착’을 심판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9일 이들의 원심을 각각 일부 파기환송하면서, 핵심 쟁점이 됐던 경영권 승계를 위한 부정한 청탁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촛불’로부터 3년이 흐르면서 ‘국정농단’ 자체를 부정하려는 움직임이 거세지는 가운데, 최고법원이 ‘대한민국 최고 정치권력과 최고 경제권력의 유착’ 불법성을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뇌물 수수와 공여 관계로 얽힌 박 전 대통령·최씨와 이 부회장의 혐의는 동전의 양면이지만, 그동안 하급심의 판단은 크게 엇갈렸다. 박 전 대통령·최씨의 2심 재판부는 포괄적 현안으로서 ‘경영권 승계작업’이 존재했다고 인정하고 부정한 청탁의 대상으로 판단했다. 개별 현안에 대해서도 ‘묵시적 청탁’이 인정된다고 봤다. 반면 이 부회장 2심 재판에선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으로 이 부회장에게 유리한 영향을 미치는 효과가 있었음은 인정하면서도 이를 모두 유죄로 보지 않아 ‘유전무죄 판결’이란 비판을 받았다. 이날 대법원은 “부정한 청탁은 묵시적 의사표시로도 가능하고 청탁의 대상인 직무행위의 내용이 구체적일 필요도 없다”며 삼성의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대한 지원금을 대통령 직무와 대가관계가 있는 뇌물(제3자 뇌물죄)로 판단했다. 대가를 바란 뇌물공여 사건이 아니라 ‘최고 정치권력자에 의한 겁박사건’으로 바라본 2심 재판에 중대한 하자가 있었음을 명백히 한 것이다.
삼성 쪽이 소유권을 넘기지 않아 뇌물에서 빼줬던 말 3마리에 대해서도 대법원은 이 부회장 2심 판결을 뒤집었다. 설사 소유권이 삼성에 있었어도 실질적인 사용·처분 권한이 최씨에게 있음에 양쪽의 의사 합치가 있었다고 보이기 때문에 말 구입대금을 뇌물로 봐야 한다는 취지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은 뇌물 혐의와 다른 공소사실을 합쳐 형량을 선고한 게 위법하다는 법리적 이유로, 이 부회장은 최씨 쪽에 건넨 뇌물액과 횡령액이 2심 때보다 늘어야 한다는 이유 등으로 2심 재판을 다시 받게 됐다. 이 부회장은 동계스포츠영재센터 16억여원과 말 34억여원이 모두 뇌물로 인정되면서 뇌물공여액이 50억원을 훌쩍 넘게 돼, 또다시 집행유예를 받기는 어려워졌다. 박 전 대통령 역시 뇌물 혐의에 대한 분리 선고가 이뤄질 경우 형량이 더 무거워질 가능성이 높다.
사필귀정이다. 아무 현안이 없는데 대통령이 ‘겁박’한다고 수십억원을 그냥 내줬다는 이 부회장 쪽 주장이나 2심 재판부의 논리는 누가 봐도 상식에 어긋난 것이었다.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성사엔 청와대 민정·정책기획 수석실과 공정거래위, 국민연금공단 등 정부기관이 총동원되다시피 했다. 현재 수사가 진행 중인 삼성바이오로직스 사건에서도 삼성이 이 부회장에게 유리한 ‘제일모직 가치 부풀리기’를 위해 분식회계를 비롯한 위법·불법 행위를 저질러왔음은 낱낱이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도 이 부회장 쪽은 불법을 인정하긴커녕 ‘자신은 몰랐다’고 버텨왔고 박 전 대통령이나 최씨 쪽은 ‘정치보복’이라는 주장만 거듭해왔다.
이 부회장과 삼성 쪽은 그동안 국민들의 피땀이 들어간 국민연금 기금이 입은 손해에 대해 제대로 사과한 적도 없다. 그래 놓고 이날 “앞으로 저희는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기업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겠다”고 두루뭉수리 사과하며 “갈수록 불확실성이 커지는 경제 상황 속에서 삼성이 위기를 극복하고 국가경제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과 성원을 부탁드린다”는 입장을 내놓은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경기침체나 한-일 무역전쟁 같은 상황 속에 또다시 전가의 보도처럼 ‘경영위기론’을 꺼내들 생각은 하지 말기 바란다.
한때 선거로 선출된 최고지도자였던 박 전 대통령이 계속해서 재판을 거부하는 것 또한 볼썽사납다. 국민들 앞에 사죄해도 모자랄 판에 ‘정치보복 주장’을 들먹이고 보수세력은 ‘사면’ 운운하는 것은 1600만 촛불 시민에 대한 기만이요 배신이다. 더이상 역사를 뒤로 돌려선 안 된다. 그게 지난 3년의 교훈이다. 다시 진행될 2심에서 엄정한 판결이 내려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