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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사설] 경계와 장벽 넘어선 ‘원더풀 미나리’ 윤여정

등록 2021-04-26 18:02수정 2021-04-26 18:39

25일(현지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린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미나리>의 할머니 역으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배우 윤여정이 오스카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AFP 연합뉴스
25일(현지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린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미나리>의 할머니 역으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배우 윤여정이 오스카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AFP 연합뉴스

“제 이름은 여정 윤이다. 많은 유럽인들은 저를 ‘여영’이나 ‘유정’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오늘은 여러분 모두를 용서하겠다.”

25일 밤(현지시각) 93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한국 배우 최초로 연기부문상(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은 위트를 담은 수상 소감을 밝혔다. 서양인들에겐 발음하기조차 어려운 이름의 한국 배우가 영화라는 대중매체를 통해 전세계인들과 만나고 한국 이민자 가족의 할머니 역할로 인종과 국적을 넘어선 보편적 감동을 이끌어낸 관록이 느껴지는 수상 소감이다.

1980년대 미국 남부 아칸소로 이주해 뿌리를 내리려 애쓰는 한국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미나리>에서 윤여정은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주면서도 전형적인 틀에 갇히지 않은 “할머니 같지 않은 할머니”를 연기했다. 그가 연기한 ‘순자’는 손주들에게 화투도 가르치고, 프로레슬링에 흠뻑 빠져 있지만, 어디서나 뿌리를 내리는 “원더풀 미나리”의 정신을 가족들에게 전하는 할머니다. <미나리>는 지금까지 전세계 영화제와 시상식에서 100여개 상을 받았는데 이 가운데 윤여정이 받은 상이 30개가 넘을 정도로 ‘순자’는 세계 곳곳에서 공감을 이끌어냈다.

올해 74살 배우 윤여정의 연기 인생은 그 자체가 많은 경계와 장벽을 넘어온 여정이었다. 19살이던 1966년 탤런트로 연기를 시작했고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화녀>(1971)로 스타덤에 올랐으나 얼마 안 돼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가 10년 넘는 공백기를 보냈다. 이혼 뒤 아이들을 키우기 위한 “생계형 배우”로 “살아가기 위해서 목숨 걸고 연기”를 했다. 60살이 넘은 뒤에야 비로소 좋아하는 영화인들과 함께 하고 싶은 작품을 골라 연기하는 “사치”를 부릴 수 있었다. ‘나이든 여배우’에 대한 고정관념을 하나씩 무너뜨리며 새로운 도전을 계속해왔다.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 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 등에서 파격적 역할을 맡았고, 김초희 감독의 독립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2020)에선 후배 감독을 위해 기꺼이 개런티도 받지 않고 출연해 인생의 지혜가 담긴 연기를 보여줬다. 최고의 배우이지만 군림하지 않고 위트와 유머, 인생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는 윤여정의 모습은 젊은 세대들도 그를 최고의 롤모델로 존경하는 이유다.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가 올해 아시아 배우인 윤여정에게 연기상을 준 데는 코로나 시대에 깊어져가는 ‘아시아인 증오’ 극복이라는 시대정신도 담겨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워싱턴포스트>도 윤여정의 여우조연상 수상, <노매드랜드>로 아시아 여성 최초로 감독상을 받은 중국계 클로에 자오 감독 등을 예로 들면서 올해 아카데미상이 다양성과 포용성의 메시지를 전했다고 분석했다. 윤여정은 시상식 뒤 기자간담회에서 “사람을 인종으로 분류하거나 나누는 것은 좋지 않다. 무지개처럼 모든 색을 합쳐서 더 예쁘게 만들어야 한다”며 “우리는 따뜻하고 같은 마음을 지닌 평등한 사람이다. 서로를 이해하고 끌어안아야 한다”고 했다. 윤여정의 수상이 인종·국가·언어의 경계와 장벽을 넘어 세계인들이 서로의 진심을 좀 더 이해하게 하는 의미 있는 한 걸음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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