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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사설] 산재 사망, ‘국가적 조사기구’ 설치를 제안한다

등록 2021-06-14 18:29수정 2021-06-15 02:10

코로나 버금가는 ‘일터의 죽음’ 방치
근본 원인 찾아 실질 해법 실행할 때
대선 후보들도 분명한 입장 제시해야
여느 날처럼 출근한 아빠, 엄마, 아내, 남편, 딸, 아들이 일터에서 사망했다는 통보를 받아드는 심정은 어떨지 상상해보자. 주위의 세상은 멀쩡히 돌아가고 있는데 그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한 지점에 치명적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가 내 가족의 생명을 삼킨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한스러울까. 이 기막힌 상황을 현실로 맞닥뜨린 가정이 지난해 882가구에 이른다. 올해도 1분기까지 238곳의 가정이 또 비탄에 빠져야 했다. 나와는 무관하다고 여길 건가. 그들 모두는 우리의 이웃이고, 친척이고, 동료 시민들이다. 그들의 일터는 나와 내 가족의 일터가 될 수도 있다.

산업재해는 때로 일과 무관한 시민들의 일상까지 덮친다. 광주 ‘건물 붕괴’ 사고가 그렇다. 철거작업의 안전을 확보하지 않아 벌어진 사고다. 작업자들은 다행히 이상 신호를 감지해 대피했지만 위험의 경계선을 지나던 9명의 시민이 희생되고 8명이 다쳤다. 건설현장과 공장에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끔찍한 부상으로 노동자의 몸이 부서지고 피 흘린다면 그 건물에 드나들고 그 물건을 사용하는 우리의 일상에도 그 참상은 스며들어 있다.

그럼에도 일터의 죽음은 너무나 쉽게 지나쳐버린다. 구의역 김군, 김용균씨, 이선호씨처럼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경우가 아니면 조용히 묻히는 죽음들이다. 코로나19로 숨진 이들이 14일 현재 누적 1988명이다. 비슷한 기간에 1100여명이 숨진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국가의 소극적 대응과 시민들의 망각 속에 오늘도 산업현장에 만연해 있다. 드러나지 않는, 드러내지 않는 ‘숨은 팬데믹’이다.

코로나는 자연이 주는 재앙이라지만 산재 사망은 인간에게 온전한 책임이 있는 재난이다. 더 분명히 말하면 ‘범죄’의 결과물이다. 영국이 2007년 ‘기업 살인법’을 제정한 배경에는 일터의 죽음이 단지 불행한 사고가 아니라 범죄, 즉 살인 행위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기업살인법 제정은 이 같은 인식이 더욱 공고화되는 사회심리적 효과를 가져왔다. 실제로도 2008년 법 시행 당시 0.8이었던 노동자 10만명당 사망사고율이 2019년엔 0.34로 줄었다.

어버이날이던 지난 5월8일 오전 장아무개씨가 추락 사고를 당해 숨진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의 작업 현장에 장씨의 신발 등이 놓여 있다.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 제공
어버이날이던 지난 5월8일 오전 장아무개씨가 추락 사고를 당해 숨진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의 작업 현장에 장씨의 신발 등이 놓여 있다.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 제공
산재는 인간의 노력으로 얼마든지 줄일 수 있음에도 우리 사회는 너무도 미온적으로 대처해왔다. 젊은 노동자들의 희생을 대가로 이뤄진 제도 개선도 늘 미흡했다. 김용균법(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이 2018년 12월 국회를 통과해 지난해 1월부터 시행됐고 중대재해처벌법도 내년 시행을 앞두고 있지만, 사회 전반의 인식과 현장의 실질적 변화는 더디기만 하다. 지난 4월 청년노동자 이선호씨의 사망과 그 이후에도 50여명에 이르는 산재 사망자 수가 이를 웅변한다. 오히려 제정된 법을 되돌리자는 철면피한 논리가 득세하는 형국이다.

비극을 제대로 성찰하지 못하고 법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사회적 논의를 심화시키지 못한 탓이다. 땜질식 대처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산재 사망을 뿌리 뽑으려면 근본적 인식 전환과 환골탈태의 제도 개혁을 이뤄내야 한다.

세월호 참사나 가습기살균제 사건과 같은 대형 인명 사고가 났을 때 특별법을 통해 조사기구를 만들어 원인을 밝히고 재발방지책을 마련해왔고 이것이 당연한 대처법이다. 인구감소나 기후위기 등 중요한 국가적 의제에 대해선 대통령 직속 위원회를 설치해 해법 찾기에 나선다. 산재 사망은 이들 사안 못지않은 사회적 참사이자 국가적 의제다. 더 뿌리 깊은 구조적 원인과 복잡다단한 디테일을 지닌 사안이다. 그동안의 대처 방식은 한계가 드러난 만큼 비상한 조처가 요구된다.

하루속히 산재 사망을 국가적 의제로 삼아 전면적인 조사·연구와 실질적인 해결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 하루라도 서둘러야 하는 이유는 매일 2~3명씩 생명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생색내기나 어설픈 타협이 재연돼서는 안 된다.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을 내세우는 재계의 반대 논리도 테이블에 올려놓고 당당하게 토론을 벌이자. 경제가 우선인지, 사람 목숨이 우선인지 사회적 합의를 이뤄내야 한다. 이 같은 과제를 수행할 ‘국가적 조사기구’의 설치를 제안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산재 사고 사망자를 임기 안에 500명대로 낮추겠다고 공약했다. 지금까지는 지키지 못했다. 남은 임기 동안 단 한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물론, 임기 이후에라도 사망자를 획기적으로 줄이기 위한 초석을 놓아야 한다. 여야 정치권도 미래세대가 더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일에 발 벗고 나서야 할 것이다. 대통령선거에 나설 후보들부터 분명한 입장과 대안을 제시하기 바란다. 가족과 작별인사도 못 한 채 허망한 죽음을 맞아야 하는 불안한 일터에 수많은 국민을 방치해놓은 채 ‘국민을 위한 정치’를 말하는 것만큼 위선적인 일이 또 있는가. 정치권과 정부의 결연한 행동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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