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미사일 2발을 발사한 지난 1월14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페이스북에 ‘주적은 북한’이란 글을 올렸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3일 발표한 국정과제에서 “‘북한 정권과 북한군이 우리의 적’임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도록 국방백서 등에 명기하는 방안을 검토한다”고 밝혔다. 앞서 윤석열 당선자는 지난 1월14일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발사하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주적은 북한”이란 단문을 올리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국방백서에 “북한 정권과 북한군은 우리의 적”이라고 적었다. 문재인 정부는 이 표현 대신 “우리 군은 대한민국의 주권, 국토, 국민, 재산을 위협하고 침해하는 세력을 우리의 적으로 간주한다”고 표기했다. 이를 두고 ‘북한에 저자세를 취했다’, ‘대적관이 풀어졌다’는 등의 비판이 나왔다. 일부에서는 국방백서가 아니라 ‘정치 백서’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윤석열 정부가 국방백서에 ‘북한 주적’이나 ‘북한 정권과 북한군이 우리의 적'이라고 다시 적으면 안보가 튼튼해지는 것일까.
원래 ‘북한 주적’은 군사안보 용어가 아닌 국내정치 언어였다. <국방백서>는 1988년부터 본격 발간됐다. 1994년까지는 ‘북한 주적’이란 표현이 없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인 1994년 3월 남북 특사 교환 실무접촉에서 북한이 ‘서울 불바다’ 발언을 해 국내 여론이 들끓었고, 이듬해인 1995년 국방백서에 처음으로 ‘북한 주적’이 등장했다.
‘북한 주적’은 격앙된 국내 여론을 달래려는 정치적 목적 때문에 나온 셈이다. 이후 북한 주적 표기는 참여정부,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때마다 안보 환경 변화에 따라 다양하게 바뀌었다.
외국은 국방백서나 유사한 공식문서에 주적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미국은 ‘위협’(threat)’이라고 표현한다. 역대 미국 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 보고서는 두루뭉술한 외교적 수사로 관련국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트럼프 대통령 당시 보고서는 직설적이란 평가를 받았는데 트럼프 보고서조차도 중국과 러시아를 경쟁자(competitor) 또는 수정주의자(revisionist)로 표현했고, ‘적’으로 명시하지 않았다.
외국이 특정국가를 주적이나 적으로 공식 표기하지 않는 것은 국익 때문이다.
냉혹한 국제관계에서 공식문서에 주적 등을 명시하면 자국의 전략적 운신의 폭을 스스로 좁히는 결과를 초래한다. 다들 자신의 패를 숨기는 카드게임에서 마치 자신의 패를 내보이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최근에는 군사 위협같은 전통적 안보위협뿐만 아니라 코로나19 같은 감염병, 기후변화, 사이버공격, 우주안보위협, 신흥기술, 공급망 등 초국가적·비군사적 위협까지 커지고 있다. 이 때문에 각국은 전략적 모호성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급변하는 안보현실에 신속하고 유연하게 대응하려 한다. 국방백서에 ‘북한정권·북한군=적’을 다시 명기하면, 표정을 숨기며 포커페이스로 일관하는 국제안보 게임에서 한국 혼자 패를 공개하는 꼴이 된다.
한국의 무기 도입 예산을 보면, 대략 70%는 북한 위협 대비용이고 30%는 일본이나 중국 등 한반도 주변국의 미래 위협 대비용이다. 경항모, 공중 급유기,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각종 지상 발사 미사일 등은 주변국 위협에 대비하는 무기들이다. 앞으로 주변국 위협에 대비하는데 더 많은 국방비를 사용해야 한다는 전문가 의견이 많다. 그런데 국방백서에 북한군을 적이라 명시하면 미래의 불확실한 위협에 대비하는데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 ‘국방백서에 북한군이 적이라 공언하고 왜 우리를 겨냥해 첨단무기를 마련하느냐’는 반발이 주변국에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국방백서에 명기하지 않는다고 ‘북한정권·북한군=적’이란 개념이 아예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분단 이후 남북 군대는 서로를 적으로 상정하고 작전계획을 세우고 훈련을 해오고 있다. 이를테면 공군은 유사시 작전계획인 ‘기계획 항공임무명령서’(Pre-ATO)를 갖고 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진 뒤 공군이 공격할 표적을 설정하면 너무 늦기 때문에 평소 공군은 북한 공격 목표를 미리 정해 놓고 훈련한다. 일선부대에서는 북한군을 적으로 표현한다. 비무장지대에서 근무하는 장병들은 맞은 편 북한군 지피(GP·감시 초소)를 ‘적 지피’라고 부른다.
인수위는 3일 국정운영 원칙을 국익, 실용, 공정, 상식 등 네 가지로 축약했다. ‘북한 정권과 북한군이 우리의 적’임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도록 국방백서 등에 명기하는 방안이 국익과 실용에 부합하는지 의문이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