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뉴스분석 왜?
자유한국당 대선후보 홍준표의 과거와 미래
자유한국당 대선후보 홍준표의 과거와 미래
▶홍준표 경남지사(63)가 31일 자유한국당 대선후보로 선출됐습니다. 반기문 전 유엔총장과 황교안 국무총리의 대선 불출마 결정으로 얻은 어부지리이긴 하지만, 2012년 총선 때 떨어진 뒤 정계 은퇴를 고민했던 정치인으로서는 나름 ‘화려한’ 부활입니다. 홍준표 후보는 늘 빨간색 의복을 하나 이상 입는 데서 알 수 있듯 튀는 정치인입니다. 강한 자에게 맞서기도 하지만, 약자에게도 막말을 서슴지 않는 독특함이 어디에서 왔는지 살펴봅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후보는 1996년 총선을 앞두고 야당과 여당을 놓고 오락가락하다가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민자당을 선택했다. 그는 그후 “당의 요구”에 따라 디제이 저격수 등 대여 공격에 오랫동안 앞장섰다. 사진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당내 경선에 출마한 홍준표 당시 의원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도동 자택을 찾아 인사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후보는 한량 기질이 있던 아버지를 닮아 노래부르기를 좋아한다. 그는 지금도 옛날 노래 500곡을 거뜬히 부를 수 있다고 말한다. 사진은 고려대 시절 하숙집에서 기타를 들고 노래 부르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야당 입당 약속깨고 여당행
“당 요구로” 대여 공격 앞장
지사땐 ‘보수 스트롱맨’ 자처
부당한 요구에 자주 저항
”통제 안되는 검사” 명성
정치인 변신 뒤 권력 편에
“말 안듣는 검사 패야” 막말 홍준표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서울지검 남부지청에 근무할 때부터였다. 1988년 5공 비리 청산작업의 하나로 노량진 수산시장 운영권 강탈 사건이 그에게 맡겨졌다. 처음 대검에서 내려온 지시는 ‘해명성 수사’였다. 홍준표는 5공화국 대통령 전두환의 형인 전기환이 노량진 수산시장의 운영권을 빼앗는 과정에 청와대와 서울시, 국세청, 감사원, 치안본부(현 경찰청) 특수대 등 권력기관이 줄줄이 관련돼 있다는 것을 알고는 두팔을 걷어부쳤다. 그러나, 상부에서는 핵심 피의자인 서울시 산업경제국장을 귀가시킬 것을 종용하는 등 수사에 제동을 걸었다. 울분을 토하던 홍준표는 이때 언론 플레이라는 일생의 ‘배움’을 얻었다. 산업경제국장이 득의만만하게 집으로 돌아간 뒤 홍준표는 풀이 죽어 사무실을 나섰다. 청사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동아일보> 기자였다. 홍준표는 자신의 집으로 가서 새벽까지 통음하면서 기자에게 수사 내용을 알려줬다. 이튿날 신문에 노량진 수산시장 사건이 대문짝만하게 나왔다. 여론이 들끓었고, 검찰 수뇌부는 수사 재개를 허락했다. 상부와 줄달리기 끝에 전기환 등을 간신히 구속했지만, 홍준표는 검찰 내부에서는 ‘통제할 수 없는 검사’로 찍혔다. 이후 그는 6공화국 실세인 박철언과 대전고검장 이건개 등 권력자를 구속했던 1993년 슬롯머신 비리 수사 등 주요 고비마다 언론을 활용했다. 정치인이 된 뒤에도 홍준표의 언론 플레이는 유명했다. 룸살롱 사진에 정보부 사건 덮어 물론, 홍준표의 실제 검사 생활은 ‘모래시계’와는 많이 달랐다. 청주에서 일할 때 그는 중앙정보부 간부 한명의 비리를 내사하다가 도중에 사건을 덮었다. “정보부 관계자가 사진 한장을 내밀어요. 제가 룸살롱에서 술마시는 장면이더군요.…공교롭게도 찍힌 사진에는 제가 두 여자 사이에 앉아 있는 겁니다.” “집사람이 볼까 겁이 났어요. 겁이 나서 정보부 내사 서류를 넘기고, 그 사진 받고 필름까지 넘겨달라고 했어요.”(<월간조선> 2011년 9월호). 징계감이었다. 또, 피의자를 손찌검한 적도 있다. 한나라당 원내대표 시절인 2008년 11월 그가 가까운 몇사람과 만나서 한 얘기다. “임채진(검찰총장)이 아무 것도 결정 못하고 헤매고 있다. 검사들이 말을 안 들을 때는 지하실로 데려가서 패야 한다. 예전에 검찰에서는 그랬다. 눈가리고 정신없이 패면 쪽팔려서 상관한테 맞았다고 얘기도 못하고 말을 잘 듣게 된다”면서 “나는 검사를 팬 적은 없지만, 00지검에 있을때 한 판사의 계좌를 추적해서 비리가 다 나왔는데도 그가 불지를 않더라. 그래서 판사를 팬 적은 있다”고 말했다. 당시 광우병 문제를 다룬 MBC 피디수첩 제작진에 대한 수사를 맡은 담당 부장검사 임수빈이 무혐의를 주장하면서 사표를 쓰는 등 상부의 구속 지시에 맞서던 때였다. 검사를 바꿔 피디수첩 제작진을 기소했지만, 결국 무죄 판결이 났다. 야당과 여당 사이에서 저울질한 끝에 여당에 둥지를 튼 홍준표는 정권교체로 1998년부터 야당 의원이 됐다. 검찰에서 일류 칼잡이였던 홍준표는 정치인이 돼서도 “당(조직)의 요구”에 충실했다. 그는 디제이(김대중)와 노무현 저격수로 오랫동안 활약했다. 이회창이 한나라당 총재 시절 전국을 돌면서 장외집회할 때 홍준표는 이회창에 앞서 마이크를 잡고 선동연설을 했다. 그는 훗날 한 인터뷰에서 “꼬마 민주당이나 국민회의에 갔었다면 (자신의 생각과)부합했을 것”이라며 “어쩌면 이회창 후보를 공격하는 킬러가 됐을 수도 있었을 것”(<한겨레> 2004.2.18)이라고 말했다. 공격수 노릇을 하던 홍준표가 정치 거물이 된 것은 이명박 정부 때였다. 이명박 정부 첫 여당 원내대표(2008년)와 최고위원(2010년)을 거쳐 당 대표(2011년)에까지 올랐다. 자기 계보원 한명 제대로 없었던 그의 고공행진은 이명박의 지원없이는 불가능했다. 홍준표는 15대 총선 때 불법 선거운동 혐의로 1999년 의원직을 잃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같은 처지로 워싱턴DC에 와 있던 이명박과 골프를 치면서 친해졌다. 홍준표는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형님”이라고 했지만, 청와대에 들어간 뒤에는 “각하”라고 불렀다. 아무한테나 막말하는 무대뽀처럼 보여도 강자에게는 깍듯했다. 2012년 총선 공천권을 행사할 꿈에 부풀어 있던 홍준표는 그러나, 2011년 말 선관위 디도스 공격 사태로 집권 여당 대표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어 2012년 4월 총선에서조차 떨어지자 한때 정계 은퇴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으나, 그해 12월 대선과 함께 치러진 경남도지사 보궐선거에서 재기에 성공했다. 경남지사 홍준표는 국회의원 홍준표와는 확연히 다른 길을 걸었다. 국회의원 시절에는 ‘반값 아파트법’을 발의하고, ‘국적법’ 개정에 앞장서는 등 중도 개혁적인 노선을 걸었다. 세금을 늘려 공공지출과 복지정책을 확대할 것을 주장하는가 하면 디제이 햇볕정책을 옹호하기도 했다(<한겨레>2004.2.18). 그러나, 경남지사로서의 홍준표는 학생들의 무상급식을 중단하고, 진주 의료원을 폐쇄하는 등 ‘우파 스토롱맨’을 자처했다. 막말과 폭언도 늘었다. 도지사의 사퇴를 요구하며 단식하는 야당 도의원을 향해 “쓰레기”라고 하는가 하면, 의료원 폐쇄에 대한 비판을 “개가 짖는 소리”라고 했다. 돈 안받았는데 전달자 회유? 대선후보 홍준표의 최대 아킬레스건은 성완종 리스트와 관련된 불법 정치자금 의혹이다. 경남기업 회장을 지낸 고 성완종이 2015년 4월 숨지기 직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2011년 홍 지사가 한나라당 대표 경선에 나왔을 때 윤승모 전 경남기업 부사장을 시켜 1억원을 건넸다”고 밝혔다. 윤승모 역시 언론 인터뷰와 검찰 조사에서 돈 심부름을 한 상황을 자세하게 진술했다. 1심 유죄(1년6개월 징역과 1억원 추징)와 달리 2심은 무죄로 나왔다. 대법원 판결이 남아 있는 데다가 사건 실체에 대한 상식적인 의문은 여전하다. 돈을 받은 사실이 없다면 검찰 수사를 앞두고 홍준표의 측근인 엄창현과 김해수가 왜 윤승모에게 전화를 걸거나 만나서 “돈을 홍준표가 아니라 나경범 보좌관한테 준 것으로 하면 안 되겠느냐’고 회유했겠는지가 설명되지 않는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후보는 빨간색의 넥타이나 셔츠, 속옷을 매일 한두개씩은 반드시 입는다. 독특하게 튀는 패션은 홍 후보의 상징이기도 하다. 홍 후보가 지난 2008년 12월 말 한나라당 원내대표 시절 예산안 날치기를 막기 위해 야당인 민주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을 점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