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19일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통상임금 소송 판결을 내리고 있다. 박종식 기자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에 따라 통상임금 소급 적용을 불허할 수 있다고 본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당시, 법원행정처와 ‘박근혜 청와대’ 간 교감이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노회찬 정의당 의원은 20일 국회에서 열린 사법개혁특별위원회의 법원행정처 질의에서 “2013년 12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통상임금 판결에 대해 ‘BH(청와대)가 흡족해 한다’는 취지의 내용이 담긴 법원행정처 문서를 판사블랙리스트 추가조사위원회가 확인했다”며 “그러나 추가조사위원회의 활동 범위 밖이라는 이유로 조사보고서에는 그 내용이 담기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BH가 흡족해한다’는 법원행정처 내부 문건은 대법원의 통상임금 판결을 앞두고 청와대와 법원행정처가 교감했다는 증거라는 얘기다.
2013년 대법원의 통상임금 판결이 있기 7개월 전인 그해 5월, 박근혜 대통령은 미국 워싱턴에서 대니얼 애커슨 GM 회장을 만났다. 당시 한국GM의 직원들은 회사를 상대로 ‘정기상여금, 업적연봉, 보험료 등을 통상임금에 포함시켜 계산한 수당 등을 지급하라’는 소송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소송의 피고인 애커슨 회장은 “한국에 80억달러를 추가로 투자하려는데 통상임금 문제를 한국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줬으면 한다”고 했고 박 대통령은 “한국 경제 전체가 안고 있는 문제다. 꼭 풀어나가겠다”고 화답했다. 재판 중인 사건에 대통령이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부적절한 발언이었다.
노회찬 의원이 이날 제기한 의혹이 사실이라면 박 대통령이 대법원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는 ‘오해’가 현실이 된 셈이다. 실제로 그해 12월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대법원은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해당한다. 이것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하기로 노사가 합의했더라도 그런 합의는 근로기준법에 위배돼 무효”라면서도 “근로자가 이를 이유로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해 계산한 수당과 퇴직금을 추가로 청구하는 것은 신의칙에 위배돼 허용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신의칙’이란 상대방의 이익을 배려해 형평에 어긋나거나 신뢰를 저버리면서 권리 행사를 하면 안 된다는 원칙이다. 정기상여금 등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하긴 했지만 “추가 임금 때문에 회사 존립이 위태로울 만큼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이 발생한다”면 통상임금 범위 확대에 따른 추가 임금을 청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양승태 대법원장과 양창수, 신영철, 민일영, 박병대, 김용덕, 박보영, 고영한, 김창석, 김소영 대법관이 다수의견에 섰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결은 ‘신의칙’을 강행규정에 우선한다는 이례적인 선언이어서 법원 안팎에서 큰 논란이 일었다. 당시 다수의견에 반대했던 이인복, 이상훈, 김신 대법관은 판결문에 “사용자는 합당한 대가를 지급하는 것이지 무슨 ‘손해’를 입는 것이 아니다”라며 “최고의 법해석 기관인 대법원은 법리를 법에 따라 선언하면 되고 그에 따른 경제적 우려를 최소화하는 것은 정부와 기업의 역할”이라고 적었다. 또 “대법원이 앞으로의 노동정책까지 고려해 현행 법률의 해석을 거기에 맞추려 한다면 법해석의 왜곡”이라며 “근로기준법의 강행규정성을 인정하면서도 신의칙으로 그 강행규정성을 배척하는 다수의견의 논리는 너무 낯선 것이어서 당혹감마저 든다“고 했다. ‘법리적으로 말도 안 되는 논리’라는 강한 비판이 소수의견 형태로 판결문에 흔적으로 남은 셈이었다.
노회찬 의원은 이날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 자체가 사법부의 독립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발언이었는데, 발언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판결 결과가 사법부 독립성을 스스로 훼손하는 결과가 나왔다”며 “이 판결이 나오자마자 법원행정처가 ‘청와대가 흡족해한다’라는 취지의 문서까지 작성했다면 이건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노 의원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이 이 사안을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별조사단장인 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은 “대법원이 어떤 영향을 받아 결론을 내지는 않는다”며 “(의혹을) 잘 검토해서 조사결과를 내도록 하겠다”고 답했다.
김태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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