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4월2일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의원총회를 마치고 오후 2시 본회의에 참석하러 이동할 때였다. 같은 시각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은 여당이 공수처법 등 자신들의 중점 법안만 내세울 뿐 방송법 등 야당 촉구 법안 통과엔 협조하지 않는다고 반발하며 각각 의원총회를 열고 있었다. 두 야당은 결국 본회의를 ‘보이콧’했다. 다음은 4월 임시국회 본회의가 첫날부터 무산되기 직전의 상황이다.
장소
국회 민주당 의총장에서 본회의장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민주평화당 의원들은 기초의회에서 4인 선거구가 확대되지 않고 2인 선거구로 ‘쪼개’진 데 대해 항의하며 연좌 시위를 하고 있었다. ‘2인 선거구로 쪼개기’를 주도한 거대 양당(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을 규탄한다는 취지다. 선거구 쪼개기로 1·2등만 지방의회에 진입할 수 있게 장벽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박지원, 천정배 의원은 이날 오후 당번이었다. ‘4인 선거구 쪼개는 기득권 야합 중단하라!’, ‘나눠먹기 적폐 2인 선거구 반대!’ 등의 구호를 써붙이고 바닥에 앉아있었다.
‘4인 선거구 쪼개기 반대’ 연좌농성중인 박지원, 천정배 민주평화당 의원.
상황 전개 1.
의원총회를 마친 민주당 의원들은 본회의장으로 우르르 이동하다 ‘옛 식구’ 박지원, 천정배 의원의 ‘소수정당 연좌시위’를 보더니 웃음이 터졌다. 문희상, 원혜영, 이석현, 백재현, 박영선, 김두관, 전해철, 신경민, 이개호 의원 등이 들러서 악수를 했다. 박지원 의원은 민주당 의원들을 향해 “여기 앉으라”고 권유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비서실 제1부속실장 출신 김한정 민주당 의원은 무릎을 굽히고 앉아 대화하기도 했다. 민주당 의원들을 보며 평화당 최경환 의원은 “양당 적폐 척결하라!”고 외쳤다. 박지원 의원이 “자유당 보이콧때문에 지금 본회의 안열린다”며 “여기 앉아가지고 우리랑 같이 하자”고 했으나 민주당 의원들은 “대선배님이…”, “고생하신다” 등의 격려(?)만 한 뒤 본회의장으로 향했다.
상황전개 2.
끄트머리에 우원식 민주당 원내대표가 나타나자 최경환 의원은 “아니 우원식 대표가 해결해야지!”라고 외쳤다. 이후 박지원 의원과 우 원내대표 웃으면서도 ‘뼈있는’ 설전을 벌였다.
박지원 : “우원식 대표. 본회의를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이 보이콧해서 안 열리니까….”
우원식 : “그러니까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어야죠.”
박지원 : “아니 그러니까. 모아서 들어가서 회의를 할 수 있게끔 하려면 우리를 꼬셔야돼.”
우원식 : “들어가시죠.”
박지원 : “맨 입으론 못가겠다.”
우원식 : (평화당에 벽에 붙여놓은 ‘4인 선거구제’ 촉구 종이 가리키며) “대표님하고 저하고 이 정도 가지고 합니까? 더 세게 해야죠.”
박지원 : “가라. 니들은 희망이 없다.”
국회 본회의장 향하다 인사중인 더불어민주당 의원들.
주석 1. 박지원 “우리를 꼬셔야 돼.”
국회 293명의 재적 의원 중 현재 민주당은 121명, 자유한국당은 116명이다. 어느 한쪽도 자력으로 법안 통과 재적 기준인 과반을 채울 수 없는 상황이다. 일부 현역 의원들이 의원직을 내려놓고 6·13 지방선거에 출마하겠다는 입장이어서 민주당은 제1당 지위 수호에 비상이 걸린 상황이기도 하다. 국민의당에서 이탈해 창당한 평화당의 의원수는 14명이다. 6명이 모자라 국회 교섭단체(20명)를 구성하지 못했는데, 정의당 6명과 공동교섭단체 ‘평화와 정의의 의원모임’을 만들며 교섭단체 협상에 참여하게 됐다. 이날이 마침 제4교섭단체가 공식 출범한 날이었다. 이들 20명의 표심이 ‘캐스팅보터’가 될 수도 있는데, 성향은 민주당과 가까운 것으로 평가된다. 기존 교섭단체 협상에서 민주당 vs 자유한국당·바른미래당이 1대2로 싸웠다면, 평화와 정의의 의원모임이 협조할 경우 2대2 구도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박지원 의원은 당장 자유한국당·바른미래당 보이콧으로 본회의가 무산될 위기에 놓였으니 ‘평화와 정의의 의원모임’을 “꼬시라”고 민주당에 ‘대놓고’ 마케팅을 한 것이다.
주석 2. 박지원 “맨 입으론 못 가겠다.”
“맨 입” 언급도 그냥 나온 얘기는 아니다. 소수 정당인 평화당과 정의당은 연동형 비례대표 도입 등 선거제도 개편을 촉구하고 있다. 지방선거 구도와 관련해 평화당 안에선 민주당이 박지원 의원에게 전남도지사를 양보하고 다른 호남 지역에 평화당이 후보를 내지 않는 식의 ‘연대’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런 상황 등을 감안해 앞으로 평화당의 협조를 이끌어내려면 민주당에서 무언가 ‘대가’를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당에 대한 협조가 본격적으로 추진되며 평화당의 “맨 입” 발언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주석 3. 우원식 “대표님하고 저하고 이 정도 가지고 합니까? 더 세게 해야죠.”
평화당은 4인 선거구 쪼개기를 폐지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기초의회 선거구 획정은 각 지방 의회에서 결정한다. 이번 각 지방 의회의 ‘일괄 행동’ 배경엔 민주당·자유한국당 지도부의 사실상 ‘묵인’이 있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소수정당들은 연좌농성까지 벌이고 있지만 민주당의 의지는 크게 엿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우 원내대표는 박 의원의 “맨 입으론 못가겠다” 발언에 평화당의 ‘4인 선거구 쪼개기 중단’ 요구를 지칭하며 “이 정도 가지고”라고 말했다. 이번 지방 의회 선거에서 제3당, 제4당 후보들이 ‘전멸’할 수 있다며 소수 정당들은 이 문제에 사활을 걸고 있는데 우 원내대표는 작은 일로 치부하는 듯한 표현을 한 것이다. 박 의원과 편하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한 대화라고 하지만, 여당 원내대표의 부적절한 인식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어 우 원내대표가 말한 ‘더 센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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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송경화 기자 freehw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