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이 경찰청 등 각 기관의 정보 관련 예산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설명과 달리, 세부 내역은 물론 ‘불법’ 지시 사항까지 한 정황이 확인됐다. 국정원은 그동안 정보 예산을 편성만 했을 뿐, 구체적인 집행 내역은 각 부처의 고유 영역이라고 설명해왔다. 당시 경찰이 국정원 감사에 대비해 “댓글 공작을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감사 대비 보고서를 작성한 사실도 처음으로 드러났다.
26일 <한겨레> 취재 결과를 종합하면, 경찰청 보안국은 2010년 ‘국정원 감사 대비’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여기에는 경찰이 국정원이 준 정보 예산으로 어떤 감청 프로그램을 구입했는지, 국정원 주문 사항을 어떻게 시정할지에 대한 내용이 상세히 담겼다.
경찰은 이 보고서에서 “퇴직 보안수사요원의 모임인 ‘충의회’를 보수우익단체로 활용하는 방안이 미흡하다”고 자체 진단한 뒤 국정원의 개선 요구 사항에 대한 조치 결과로 “정부 정책을 반대하는 글에 대해 반론 글을 게시하는 등 온라인 활동을 강화하겠다”고 적었다. 또 “사이버심리전은 단순 수세, 방어적 입장에서 탈피해 반박 댓글 달기 등으로 심리전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겠다”고 했다. 국정원의 불법적인 ‘댓글 공작’ 지시에 따른 답변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국정원은 각 기관의 정보 관련 예산 편성권을 갖고 있지만 예산을 나누기만 할 뿐 실제 집행은 각 기관의 독자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국정원이 ‘정보 및 보안업무기획·조정규정’ 5조에 따라 정보 및 보안 업무에 관여할 수 있는 조정 대상 기관은 외교부, 통일부, 법무부, 국방부, 행정안전부 등 부처 전반과 ‘그 밖의 정보 및 보안 업무 관련 기관’ 등이다.
이처럼 각 부처의 정보예산 편성권을 가진 국정원은 매년 1회 이상 예산과 보안 업무에 대한 감사를 실시하지만, 예산은 각 부처에서 ‘알아서’ 집행한다는 게 그간 국정원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경찰청이 작성한 감사대비 보고서에 따르면, 경찰청은 ‘댓글 공작’에 대한 국정원의 지시를 받고 사후 보고까지 한 셈이다.
그러나 국정원의 다른 부처 정보 활동 ‘개입’과 불법 행위 지시 등이 있더라도 이를 감시할 수 있는 장치가 없다. 국정원 감시네트워크의 분석 결과를 보면, 내년도 경찰청·국방부·통일부·해경 등 4개 기관에 국정원이 편성한 정보예산, 비밀활동비 추정 예산은 총 1939억5000만원으로, 이는 14개 기관에 편성된 특수활동비의 69.3%(2799억7700만원)에 이른다. 그러나 경찰 등 각 부처의 정보예산 심사는 각 소관 상임위원회에서 이뤄지는 게 아니라 국회 정보위원회에서만 예결산 심사가 이뤄진다. 정보위원회 예산 심사는 ‘비공개’로 진행되며, 예결소위를 거치지 않고 총액만 국회 예결위원회에 보고하도록 돼 있다. 국정원 개혁위원회에서 활동한 장유식 변호사는 “각 부처의 정보예산안 심사에 대한 투명성을 높이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서영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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