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가 지난달 29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제19차 온택트 의원총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 대표는 국민에게 사과하면서 내년 4월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에 후보를 내겠다는 뜻을 밝혔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이 내년 4월 보궐선거에 서울·부산시장 후보를 공천하기 위해 실시한 당헌 개정 전당원 투표가 1일 저녁 마감됐다. 공천 찬성 여론이 압도적인 당내 분위기로 미뤄 당헌 개정안은 무난히 통과될 공산이 크다. 정치적 결과에 대한 숙고 없이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고 당헌에까지 명문화했던 무공천 약속을, 당원 대중의 다수 의견을 근거로 5년 만에 뒤집게 되는 셈이다. ‘현실론’을 핑계로 정치 혁신의 명분을 너무 쉽게 버리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날 오후 6시 전당원 투표 마감을 앞두고 민주당 누리집 게시판과 당원들의 소셜미디어(SNS)에는 찬성 투표 사실을 알리는 인증샷이 종일 이어졌다. 앞서 이낙연 대표는 투표 첫날인 31일 대표실 명의 트위터에서 “홈페이지와 앱을 통해 온라인 투표로 참여해달라”고 독려하기도 했다. 민주당 핵심 관계자는 “당내에도 반대 의견이 있기 때문에 찬성률이 70% 안팎으로 나오지 않을까 예상한다”고 말했다. 지난 3월 비례위성정당 참여를 묻는 전당원 투표는 당원 30.6%가 참여해 74.1%의 찬성률로 가결됐다.
“국정과제 완수와 정권 재창출을 위해선 내년 재보선 승리가 매우 중요하다”(민주당 전당원 투표 제안문)며 당헌 개정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당내 분위기와 달리, 당 안팎의 전문가들 의견은 우호적이지 않다. 2010년 당시 당 혁신의 일환으로 ‘전당원 투표 도입’을 강하게 요구했던 한 당내 인사는 “지도부가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결정을 하면서 그 책임을 당원에게 미루는 수단으로 전당원 투표를 활용하는 듯해 당혹스럽다”고 했다. 그는 “전당원 투표는 지도부의 독주를 견제하고, 당의 핵심 가치와 정책에 대한 내부 동의를 강화하기 위한 절차적 수단으로 도입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민주당이 약속 번복의 수단으로 전당원 투표를 활용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 시절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는 기초선거 무공천 공약을 전당원 투표를 거쳐 철회했다. 21대 총선을 앞둔 지난 3월에는 비례위성정당을 ‘꼼수’라고 비판해온 기존 입장을 뒤집어 전당원 투표를 통해 위성정당 참여를 결정했다. 이를 두고 지도부가 도덕적·정치적 부담을 덜기 위해 당원들의 결정으로 책임을 미루는 ‘당원 위임 민주주의’라는 진단도 나왔다.
오랜 숙의를 거쳐 결론을 내는 것이 아니라, 여론조사처럼 당장의 선호를 취합하는 데 그치는 전당원 투표 방식에 대해서도 문제제기가 끊이지 않는다. 실제 이번 전당원 투표 제안문을 봐도 ‘문재인 정부 성공을 위해 재보선 승리가 필요하다’는 설득만 있을 뿐, 입장 번복에 따른 정치적 신뢰 저하 등 후보 공천의 부정적 효과에 관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방향을 이미 정해놓고 당원에게 뜻을 묻는 방식이란 점도 ‘당원 민주주의의 활성화’가 아닌 ‘당원의 도구화’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첨예하게 대립하는 문제를 두고 전당원 투표를 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결과가 뻔히 예상되는 사안에 대해 이 방식을 사용하는 것은 지도자가 책임을 희석하기 위한 것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며 “아이티(IT) 기술 발달로 더 손쉬워진 온라인 전당원 투표가 당내 민주주의 확대가 아닌 동원의 정치의 구실로 악용될 수 있다”고 꼬집었다.
전당원 투표로 당의 중대 결정을 내리는 절차 자체는 문제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은 “공당이 당원투표로 중대 사안을 결정하는 것은 절차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했다. 서 연구원은 다만 “민주당 지도부와 당원들이 (약속 파기의) 부끄러움을 무릅쓰기 위한 수단으로 전당원 투표를 활용하고 있다는 게 문제”라고 꼬집었다.
‘민주당 지도부의 현실적 선택’이라고 이해하면서도 이런 행태가 반복될 경우 정치적 냉소와 혐오를 키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김정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정치학)는 “이렇게 해도 선거에 이기는 데 지장이 없다는 정치적 자만감과 선민의식이 핵심”이라며 “약속을 뒤집으면 지지율이 떨어지거나 중도층이 이탈하는 등의 징벌효과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으니 당헌이 휴지 조각 취급당하고, 정치는 혐오와 냉소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야당은 이날도 민주당의 이런 행보를 강하게 비판했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민주당 대표 시절의 문재인 대통령이 2015년 고성군수 재선거 현장을 방문해 “새누리당은 재선거의 원인 제공자이기에 후보를 내지 말아야 한다”고 발언하는 영상을 튼 뒤 “고성군수 재선거에 국민이 부담할 예산만 수십억원이라고 한 대통령께서는 내년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에 얼마나 비용이 드는지 알고 있냐. 서울 571억원, 부산 267억원 합해서 838억원의 선거비용을 시민들이 부담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장태수 정의당 대변인도 논평을 내어 민주당의 전당원 투표를 “책임정치라는 약속어음을 발행하고는 상환기일이 돌아오자 부도내는 행태”라며 “어음 발행 당사자는 뒤로 쏙 빠지고, 어음에 보증을 선 당원들에게 책임을 미루는 모습은 민망하다”고 지적했다.
민주당은 전당원 투표 결과를 2일 당 최고위원회에 보고한 뒤 공개할 예정이다.
정환봉 노지원 노현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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