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1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전직 대통령 구속 관련 대국민사과와 함께 인적쇄신을 약속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15일 구속 수감된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과 관련해
“역사와 국민 앞에 큰 잘못을 했다”며 고개를 숙였다. 국민의힘과 그 전신인 미래통합당·자유한국당을 통틀어 두 전직 대통령의 과오에 대해 사과한 것은 처음이다. 이날 사과를 두고 당내 친박 그룹 일부와 당밖 강경파가 반발했지만, 표현 수위나 강도는 애초 예상만큼 높지 않았다.
“집권여당 책무 못 다한 무거운 잘못”
김 위원장은 이날 오전 국회에서 연 긴급 기자회견에서 “지금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 2명이 동시에 구속 상태에 있다. 국민 여러분께 간절한 사죄의 말씀을 드리려고 이 자리에 섰다”며 사과문을 읽기 시작했다. 김 위원장이 가장 먼저 짚은 것은 두 대통령 재임기에 집권 여당으로서 국정 운영에 총체적으로 실패했다는 점이었다. 그는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은 국가를 잘 이끌어가라는 공동 경영의 책임과 의무를 국민들로부터 위임받게 된다. 저희 당은 당시 집권 여당으로서 책무를 다하지 못했으며, 통치권력의 문제를 미리 발견하고 제어하지 못한 무거운 잘못이 있다”고 밝혔다.
‘국정농단’과 ‘정경유착’이라는 보수세력의 역사적 과오에 대해서도 용서를 구했다. 그는 “두 전직 대통령의 과거에는 정경유착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다. 특정 기업과 결탁해 부당한 이익을 취하거나 경영승계 과정의 편의를 봐준 혐의 등이 있다”며 “공적인 책임을 부여받지 못한 자가 국정에 개입해 법과 질서를 어지럽히고 무엄하게 권력을 농단한 죄상도 있다”고 말했다. 당내 일부와 외부 강경파가 극구 부인해온
‘최순실 국정농단’의 실체를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삼성그룹의 경영권 승계를 지원하는 대가로 뇌물을 받았다는 특검의 혐의 내용에 대해서도 모두 수긍한 셈이다.
김 위원장은 이어 “역사와 국민 앞에 큰 죄를 저질렀다”며 “이 작은 사죄의 말씀이 국민 여러분의 마음에 맺혀있는 오랜 응어리를 풀어드릴 수는 없겠지만 다시 한 번 진심을 담아 고개 숙인다”고 말한 뒤 기자 회견장을 떠났다.
홍준표 “이렇게 배알 없는 야당 처음 봐”
김 위원장은 애초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지 4년째 되는 지난 9일 대국민 사과를 하려고 했지만,
당내 반발과 대여 투쟁력을 분산시킬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연기했다. 이날 사과를 앞두고 국민의힘 안팎에선 김 위원장이 문재인 정권의 독선적 국정 운영에 길을 터준 국민의힘의 과거 잘못을 포괄적으로 사과할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에둘러가지 않고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내년 보궐선거 승리를 위해선 지지세력 확장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선 과거의 잘못에 대한 확실한 사과가 필수불가결하다고 본 것이다.
김 위원장의 사과에 대한 정치권 반응은 엇갈렸다. 예상대로 친박과 강성 보수는 반발했다. 친박계 5선 의원인 서병수 국민의힘 의원은 페이스북에 “성적 편견으로 적폐를 덮어씌운 일부 무책임한 세력에 의해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었다는 게 나의 소신”이라며 “특정 기업과 결탁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했고, 경영승계 과정의 편의를 봐줬으며 권력을 농단했느니 하면서 재단해 버리면 어쩌겠다는 것이냐”고 따졌다. 홍준표 의원도 “실컷 두들겨 맞고, 맞은 놈이 팬 놈에게 사과를 한다. 25년 정치를 했지만, 이런 배알도 없는 야당은 처음 본다”고 비꼬았다.
시기·형식 등을 이유로 김 위원장의 사과를 만류했던 당내 이견 그룹은 잠잠했다. 한 재선 의원은 “(사과를 해서) 중도가 우리에게 오면 좋은데, 중도도 못 잡으면서 내부 분란이 나오면 더 큰 손해다. 지금으로선 (당내) 분란이 안나오는게 최선의 대응책”이라고 했다. 다른 재선 의원도 “큰 선거를 앞두고 있는데, 이미 구속된 두 전직 대통령을 감싸기 위해 당내 분란을 일으킬 이유가 있겠느냐”며 “사과를 결행하기 전에는 시기와 형식, 수위를 두고 의견을 낼 수 있겠지만 사과 이후에 토를 다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고 했다.
중진들 “사과 전에야 의견 낼 수 있지만…”
다수의 중진 의원은 사과에 공감하며 김 위원장에 힘을 실었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페이스북에 “어느 권력도 국민의 위임을 수행하지 못하거나 위임하지 않은 일을 저질렀다면 책임을 져야 한다”며 “국민들께 고개를 숙이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라고 썼다. 4선의 김기현 의원도 페이스북에 “위선과 거짓으로 점철된 문재인 정권과 우리 국민의힘이 무엇이 다른지를 확실하게 보여드리도록 더욱 노력하겠다. 오늘 우리의 사과는 ‘굴욕’이 아니라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한 ‘용기 있는 진심’이다”라는 글을 올렸다. 이날 대국민 사과 회견에 함께 한 주호영 원내대표는 “지금은 위원장의 저런 사과가 국민들께 진정성있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성찰하고 돌아보는 계기로 삼는 것이 우리의 우선 과제”라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은 “행동으로 보여달라”고 주문했다. 신영대 대변인은 “국민은 김 위원장이 광주에서 무릎을 꿇으며 사과했으나 본회의에서 5·18 관련 법안에 반대표를 던진 국민의힘을 기억한다. 세월호 유가족을 찾았으나 그 관련 법안에는 반대했던 그 모습도 기억하고 있다”며 “사과와 반성이 진심이라면 이제 행동으로 보여주기 바란다”고 했. 정의당 장태수 대변인은 “사과에 공감한다”면서도 “역사와 국민 앞에 큰 죄를 저질렀다는 김 위원장의 사과가 국민의힘 구성원 모두의 사과이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노현웅 김미나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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