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스웨덴 스톡홀름 왕궁에서 카를 구스타프 스웨덴 국왕과 만난 문재인 대통령 부부. EPA 연합뉴스
“당신 주머니나 가방에 책을 넣고 다니는 것은, 특히 불행한 시기에,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다른 세계를 넣고 다니는 것을 의미한다.” ―오르한 파묵, <다른 색들> ‘독서에 관하여’
사람 사이에 인연이 있듯 사람과 책 사이에도 인연이 있다. 오랜 긴장의 시간을 벗어나 수락산 쪽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를 들으며 가장 먼저 손에 잡은 책은 움베르토 에코의 <가재걸음>이다. 부제로 붙은 ‘세계는 왜 뒷걸음질 치는가’에 눈길이 닿는다. 많은 이의 선한 노력에도 끊임없이 계속되는 분쟁이 늘 궁금하다. 짧지 않은 기간, 국정이 돌아가는 공간에서 곁눈질한 탓이리라. 거기 한 구절에서 몰랐던 책을 만났다.
“올여름에 내가 인상적으로 읽은 책 중에 하나는 피터 홉커크의 <그레이트 게임>이었다. 분량이 624쪽에 달한다는 사실에 놀랄 필요는 없다. (…) 야심에 찬 장교들과 냉철한 모험가들이 아르메니아 상인이나 순례자로 변장해서 유럽인들이 이전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사막과 산들을 가로지르는 이야기다. (…) 부시와 푸틴은 가장 막강하고 잘 훈련된 군대도 모든 산길을 알고 있는 부족들 앞에서는 속수무책인 지역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이 책을 꼭 읽어야 할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 <가재걸음> ‘왓슨 박사와 아라비아의 로렌스 사이’
평소 에코라면 중세부터 현재, 소설부터 산문까지 늘 설렌다. 부시와 푸틴이 읽어야 할 책이었지만, 에코가 읽으라고 권하는 책을 몰라라 할 수 없다. 마침 번역돼 있고, 일찍부터 중앙아시아에 관심을 두었던 사계절출판사의 책이라 반갑다. 사계절이 발간한 대하소설 <임꺽정>의 저작권을 위해 개성으로 오가며 함께 작가 홍명희의 손자 홍석중 선생을 만난 기억에 가슴이 뜨겁다. 며칠 뒤 <그레이트 게임>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재미있는 책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는 에코의 말과 달리 너무나 흥미진진하다. 캅카스에서 티베트까지, 젊은 열정과 무모함이 그대로 전해져오면서 진이 빠졌던 몸과 마음이 되살아났다. 적절한 인연으로 새 기운을 얻는다.
한 권의 책과 인연을 맺은 사람이 대통령이라면 그 영향은 어마어마하다. 김대중 대통령은 청주교도소에서 당신뿐 아니라 이 나라에도 희망을 줄 책을 만난다. 이희호 여사는 김대중 대통령이 부탁하지 않아도 도움이 될 것 같으면 책을 사서 넣어주었는데, 그중 하나가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고백한다. “몇 번을 정독했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감명을 받았다. 아무것도 없는 독방에서 인류의 미래를 설계했다. 부수고 다시 짓는, 즐거운 상상이었다. 새로운 세계의 지침서였다.”(김대중, <김대중 자서전2> ‘21세기는 누구 것인가?’) <제3의 물결>은 특히 불행한 시기에,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다른 세계였다.
그로부터 17년이 흘러 대통령이 된 김대중은 정보화 시대에 한국을 지식과 정보의 강국으로 만들고 싶었던 오래된 꿈을 시작한다. “새 정부는 우리의 자라나는 세대가 지식정보 사회의 주역이 되도록 힘쓰겠습니다.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쓰는 나라를 만들어 정보 대국의 토대를 튼튼히 닦아나가겠습니다”라고 취임사에 남긴다.
1998년 12월21일 정보통신부 장관에 남궁석 삼성에스디에스(SDS) 사장을 임명하며 “정보통신부는 21세기 국운을 좌우하는 중요한 부서입니다”라 당부하고, 정보화 사회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것을 주문한다. 대통령의 독서로 시작된 새로운 시대의 첫걸음이었다. 지금 그 꿈이 대부분 실현됐다는 것이 놀랍다.
처칠의 <로마제국 흥쇠망사>, 링컨의 <워싱턴의 생애>
독서는 크든 작든 알게 모르게 모두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대통령의 독서에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그만큼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클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처칠은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흥쇠망사>를 스스로의 필독서로 삼았다. 다양한 인간의 모습 속에서 2차 세계대전을 헤쳐갈 지혜를 얻었다. 링컨은 삽을 들고 아버지를 따라가면서 주머니에 책을 넣었다. 그중 하나가 파슨 윔스가 쓴 <워싱턴의 생애>다. 온몸이 부르르 떨리는 경험을 통해 링컨은 미국의 독립정신을 이해한다. 역사적인 독서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들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책을 통해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합니다”라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오랜 변호사 생활로 드러낼 기회가 없었지만, 문 대통령은 문학에도 조예가 깊다. <죄와 벌> <까라마조프 형제들>의 등장인물들과 절망, 희망을 함께해왔을 것이다.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원칙, “사람이 먼저다”라는 좌우명 역시 대통령을 염두에 두지 않은 삶이었음에도 시공을 넘나드는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싹텄을 것이라 짐작한다.
어떤 삶도 소중히 여기며 권위주의를 내려놓은 지도자의 모습은 아직 모두에게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결국 서로를 존중하는 길로 갈 것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자기 삶의 주인이고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것을 알기에 발걸음이 느렸다.
2019년 6월14일, 문재인 대통령은 스웨덴 의회 연설에서 “스웨덴은 한국인에게 오랫동안 이상적인 나라였다”고 운을 떼며 한국의 시 한 편을 소개한다. 1968년 전쟁의 상처 속에서 민주주의를 꿈꾸며 스웨덴을 묘사한 시인 신동엽의 시였다.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럿셀, 헤밍웨이, 장자. 휴가 여행을 떠나는 총리는 기차역 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역장은 기쁘겠소라는 인사 한마디만을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그 중립국에서는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 내는 미사일 기지도 탱크 기지도 들어올 수 없는 나라, 황톳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 병을 싣고 삼십 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가더란다.” ―신동엽, ‘산문시1’
거의 시 전문이다. 대통령과의 교감이 있었지만, 실무자로서 긴 시를 다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 연설문에 어렵게 시를 축약했는데 대통령은 수정본에서 거의 다 살려놓았다. 더군다나 “한국인들은 이 시를 읽으며 수준 높은 민주주의와 평화, 복지를 상상했습니다”라고 부연해 넣었다. 스스로 꿈꿨던 대한민국의 미래상이었을 것이다. 한국전쟁 때 야전병원단을 파견해 2만5천 명의 유엔군과 포로를 치료하고 한국의 국립중앙의료원 설립을 도왔을 뿐 아니라 한반도 평화를 위해 서울과 평양, 판문점 총 3개의 공식 대표부를 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 스웨덴에 대한 고마움을 대통령은 한 편의 시로 아름답게 전달했다. 스웨덴 의원들도 뜨거운 박수로 응답했다.
스웨덴은 2000년 남북 정상회담부터 역사적인 1·2차 북-미 정상회담까지 한반도 평화를 만들 당사국들이 만나고 대화하는 기회를 마련한 나라다. 노벨평화상 수상자 알바 뮈르달 여사는 이곳 의회에서 최초로 세계의 군축을 선언했고, 앞으로도 스웨덴은 한반도와 세계 평화에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개발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핵무기를 포기하고 평화적인 군축을 제시한 스웨덴의 길을 믿는다” “또한 그것은 인류가 새로운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신뢰에서 비롯되었다”고 역설했다. 대화로 평화를 이룰 수 있고 평화적 방법으로만 평화가 실현될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핵 없는 한반도 역시 가능하다. 좋은 기억, 갈등 속에서도 결국 올바른 길을 찾아낸 인류를 긍정할 때 발현되는 힘이다.
<까라마조프 형제들> 에필로그에서 알류샤가 소년들에게 남긴 믿음과 희망의 근거가 떠오른다.
“우리 마음속에 단 한 가지라도 좋은 기억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언젠가 우리의 구원을 도울 겁니다. 자기가 지금, 이 순간 얼마나 선량하고 훌륭했는지만은 감히 마음속으로 비웃지 못할 겁니다.”
우리는 사실 매일 엄청난 독서를 하고 있다. 간단한 서평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배우고, 거리의 현수막을 통해, 영화와 만화를 통해, 뉴스와 핸드폰을 통해, 대화 속에서도 지혜는 넘쳐난다. 그러나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다른 세계를 만나기 위해서는 스스로 책장을 넘기는 수고를 거쳐야 한다.
물론 대통령이라면 거기서 한 발 더 나가야 한다. 언제나 두려움 속에서, 언제나 희망을 향해 책장을 넘겨야 한다. 비 내리는 저녁, 서점에 간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비를 피해 떡갈나무 아래에서 과거와 또 미래와 연결해주는 지혜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책 속에 모든 길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새로운 길을 가는 데 독서가 든든한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
신동호 시인·전 대통령 연설비서관
*지도자는 진지한 삶과 독서로 탄생합니다. 그의 말과 글에는 마치 수면 아래 빙산처럼 오랜 시간 다져진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어떤 책이 그에게 존재의 외투가 됐을까요.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으로 5년 내내 연설문을 썼던 신동호 시인이 역대 대통령들의 독서가 어떻게 말과 글, 연설에 반영됐는지 좇아가는 글을 연재합니다. 3주마다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