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14일 청와대에서 생각에 잠긴 채 주한 외국대사 신임장 제정식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노 대통령은 레임덕에 빠져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꼬인 정국 풀려고 한나라 요구 수용
명분없는 인사권 포기 ‘레임덕’ 촉발
섣부른 정치협상 제안 ‘제발 찍은 셈’
명분없는 인사권 포기 ‘레임덕’ 촉발
섣부른 정치협상 제안 ‘제발 찍은 셈’
청와대가 27일 저녁,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지명을 철회한 것은 완전한 ‘항복 선언’이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정치협상을 제의해 놓은 마당에 한나라당의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국정 파행 상태를 풀어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대화를 ‘애걸’하고 있는 셈이다.
한나라당은 환영의 뜻을 밝히면서도 “정치 협상과는 별개”라고 선을 그었다. 청와대는 인사권까지 스스로 훼손하면서 ‘전효숙 카드’를 포기했지만, 그에 따른 정치적 대가를 얻을 것 같지는 않다.
청와대의 실패는 느닷없이 한나라당에 여·야·정 정치협상회의를 제의할 때부터 이미 예견됐던 것이다. 누가 봐도 “전효숙 카드를 포기할 테니 국정운영에 협조해달라”는 메시지를 담은 정치협상회의 제안을 한나라당이 덥썩 받을 리 만무했다. 한나라당은 27일 오전 최고위원회의라는 형식을 거쳐 노 대통령 제의를 공식 거부했다. 나경원 대변인은 “국정을 거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제의의 진정성이 의심스럽고, 의전과 절차도 잘못됐다”고 이유를 밝혔다.
정치적 타협의 실패 책임은 일차적으로 노 대통령에게 있다. 정치에서 ‘진정성’은 ‘절차’로 입증할 수밖에 없다.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이 이병완 청와대 비서실장의 기자회견 ‘직전’에야 협상을 제의한 것을 문제삼았다. 열린우리당의 김근태 의장과 김한길 원내대표도 여당과 ‘사전 협의’를 하지 않은 데 불만을 표시했다. 의전과 절차가 잘못됐다면 고치면 된다.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라는 데 있다. 현직 대통령과 야당의 대화 실종에는 두 가지 구조적인 문제가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첫째,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긴장 관계다. 정부와 여당의 지지율이 동반 추락하면서, 노 대통령과 여당은 ‘네 탓 공방’을 벌이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노 대통령은 여권의 ‘중심’이 아니라 ‘곁가지’로 밀려나게 되어 있다. 열린우리당의 김근태 의장과 김한길 원내대표가 이날 저녁 청와대 만찬을 거부한 것은 상징적 사건이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내년 정계개편 국면에서 노 대통령이 탈당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한나라당으로선 노 대통령과 대화를 해야 할 ‘실익’이 별로 없다.
둘째, 한나라당 지도부에도 문제가 있다. 강재섭 대표와 김형오 원내대표는 온건한 합리주의자들이다. 그런데 대선 주자가 아니다. 야당의 힘은 대선 주자들에게 쏠리게 되어 있다. 리더십이 없는 집단에서는 강경파의 목소리가 득세한다. 한나라당 지도부가 노 대통령과 대화를 하려고 해도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한나라당의 이런 구조는 내년 6월 대선 후보 선출 때까지 바뀌지 않는다.
심지어 국회에서는 이런 일도 벌어지고 있다.
여야 원내대표는 지난 16일, 헌법재판소장 임명동의안 처리를 미루고, 국방개혁법 등 주요 법안을 오는 30일 본회의에서 합의 처리하기로 했다. 국방위원회 법안심사소위가 지난 21일과 22일 법안을 심의했지만, 한나라당의 황진하·고조흥 의원 등이 북한 핵실험, 전시작전통제권 등을 이유로 반대했다. 상임위 소속 의원들의 ‘정책적 소신’이 원내대표들의 ‘정치적 합의’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다.
이런 ‘구조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앞으로도 노 대통령과 한나라당의 대화가 이뤄질 가능성은 별로 없다.
‘정권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는 사법개혁안과 국방개혁안의 국회 처리도 요원한 상황이다. 이대로 가면, ‘정권을 뭐하러 잡았느냐’는 소리가 나올 판이다. 올해를 넘기면 ‘식물 정권’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의 임기는 2008년 2월까지다. 이런 상태가 장기화한다면 정권이 문제가 아니라, 나라 전체가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개인적으로 만나면, “참여정부가 경착륙하면 나라에나 한나라당에나 불행이다. 연착륙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진정성’은 없어 보인다. 정권의 ‘재집권 음모’를 여전히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답답한 상황이다.
열린우리당 주변에서는, 노 대통령이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한다면, ‘극단적 선택’을 할 수도 있다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전효숙 헌재소장 지명에서 철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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