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 영포라인 흥망사
▶ 이명박 대통령의 옛 고향마을인 포항 덕실마을 어귀에는 한복 입은 이 대통령 부부를 조각한 대형 부조가 서 있다. 이 대통령과 인척관계인 한 기업인이 지난해 11월 기증한 작품이다. 조각의 주인공에 대한 고향사람들의 애정은 여전히 두터웠다. 이영두(75) 할머니는 “농사철이라 관광차가 마이(많이) 줄었다”며 “저쪽 당들이 대통령을 고마(그만) 헐뜯고 파뒤비면(파 뒤집었으면) 좋겠구먼”이라고 말했다. 할머니의 따뜻한 환대를 뒤로하고 나선 귀경길 내내 저들의 소박한 자부심을 갉아먹는 영포라인의 번지르르한 얼굴들이 떠올랐다. 영포라인의 몰락사가 후대에 교훈은 될까.
방통대군 최시중·왕차관 박영준
이상득 소개로 MB와 인연
방송·실권 움겨쥐고 탄탄대로 “VIP께 일심으로 충성”
“뭔가 많이 잘못됐다”
정권말 비리 발목잡혀 감옥행
이상득은 수사 선상 올라 이명박 정권은 2008년 출범 초 ‘강부자’(서울 강남지역의 부자) 또는 ‘고소영’(고려대, 소망교회, 영남) 정권으로 불렸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적확하지 않은 별명이었다. 처음부터 인구 53만명의 중소도시인 포항 출신 인사들이 중심이 된 ‘영포정권’이었다. ‘영포’는 이명박 대통령의 고향인 경북 영일·포항에서 따온 말이다. 지금의 포항시는 원래 영일군이었다. 1949년 영일군의 읍에서 시로 승격한 포항시는 1973년 포항제철이 들어선 뒤 급격히 성장해, 1995년 모체인 영일군을 흡수·합병했다. 영일이 포항이자 포항이 영일이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첫해인 2008년 연말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열린 ‘영포회’ 송년회는 영포정권의 한 단면을 보여줬다. 90명에 이르는 참석자들은 이 자리에서 방송통신위원장 최시중의 선창으로 “이대로!” “나가자!”를 외쳤다. “이대로”는 “이명박을 대통령으로”의 줄임말로, 2007년 대선 때 이명박 캠프의 구호였다. 포항 출신 5급 이상 공직자인 이들은 스스로 ‘호시절’임을 실토했다. “물 좋은 때 고향 발전을 못 시키면 죄인이 된다.”(박승호 포항시장) “속된 말로 동해안에 노났다. 우리 지역구에도 콩고물이 떨어지고 있다.”(강석호 국회의원/영양·영덕·봉화·울진군) “어떻게 하는지 몰라도 예산이 쭉쭉 내려온다.”(최영만 포항시의회 의장) 영포라인의 정점에는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의원(전 국회부의장)과 멘토인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있다. 이상득 의원은 별도의 직책을 맡지는 않았지만, ‘영일대군’ ‘상왕’ ‘만사형통’으로 불릴 정도로 국정 운영 전반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초기 내각과 청와대, 정보기관 등에는 ‘이상득 사람’이 즐비하게 포진했다. 초대 총리 한승수, 기획재정부 장관 강만수 등은 13대 국회 때부터 이상득과 아주 가깝게 지낸 인물들이다. 초대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 박영준과 정무1비서관 장다사로는 각각 이상득 의원 보좌관과 부의장 비서실장을 지냈다. 코오롱그룹 출신인 국정원 기조실장 김주성도 이상득 인맥이다. 대선 때 엠비 캠프 ‘6인회의’의 핵심 멤버였던 최시중은 지난 4년 동안 방송통신 쪽에서 전권을 휘둘러 ‘방통대군’으로 불렸다. 정권 초반 한국방송과 문화방송(MBC), 와이티엔(YTN), 연합뉴스 사장 등 공영(성) 언론의 사장을 엠비맨으로 강제 교체했다. 또 다수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동아일보>, <매일경제>에 종편채널을 무더기로 허용하고, 이들에게 각종 특혜를 줬다. 이상득 최시중이 영포라인의 ‘쌍끌이’ 기관차였다면, 박영준의 역할은 총간사였다. 박영준은 경북 칠곡 출신이지만, 1995년 국회 비서관으로 이상득과 인연을 맺은 뒤 2005년 서울시 정무국장으로 옮기면서 이명박의 신임을 받았다. 두 형제와의 10여년에 걸친 긴밀한 관계로 그는 범 영포라인으로 분류된다. 그는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 시절에는 내각과 공기업 기관장 및 감사 인사 등을 총괄해 ‘왕비서관’으로 불렸다. 2009년 1월 국무차장이 된 이후에는 ‘왕차관’으로 국정의 모든 부분에 개입했다. 이영호(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 이인규(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 등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불법사찰을 주도했던 핵심 실무자들도 박영준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형제의 고향 포항에선 “분위기가 뒤숭숭” 지난 8일 찾은 포항에서 영포회원들이 왜 “이대로! 나가자!”를 희망했는지를 일부 엿볼 수 있었다. 올해 1월에 개통한 38km의 국도대체우회도로(남구 동해면~북구 흥해읍 영일만항)에는 시원스레 차들이 달렸으며, 울산~포항 고속도로(2014년 완공 예정)와 포항~영덕 고속도로(2015년 완공 예정)의 공사도 곳곳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이들은 ‘형님 예산’으로 비판받긴 했지만, 철강 등 산업물동량을 원활하게 수송하기 위해 지역에서 오랫동안 요구했던 숙원사업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다지 통행량이 많지도 않은 구룡포에서 호미곶까지의 4차선 도로 신설 등은 순전히 영포정권의 힘인 듯했다. 건설공사가 한창인 포항~삼척 사이의 동해중부선 철도도 경제성보다는 영포라인의 고향발전 의지가 더 많이 실린 것으로 보였다. 겉으로의 화려함과 달리 포항의 민심은 좋지 않았다. 죽도시장에서 만난 상인들은 한결같이 “장사가 너무 안된다”고 말했다. 구룡포 한 낚시집에서 만난 김아무개(45)씨는 “먹고 살기 바쁜데 이상득이든 최시중이든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포항와이엠시에이(YMCA) 사무총장 서병철(47)은 “이익이 대폭 줄어든 포스코가 최근 돈줄을 졸라매는 바람에 시내 경기가 안 좋은데다가 영포라인을 둘러싼 비리 의혹에 김형태 국회의원 당선자의 성추문까지 겹쳐 시민들이 심리적으로 동요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영포라인의 힘은 대통령 이명박과의 관계에서 비롯됐다. 형님 이상득은 어릴 때부터 이명박 집안의 희망이자 기둥이었다. 이상득은 일본 오사카에서 1935년 이홍우(1981년 작고)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까지 일본에서 자랐다. 해방 직후인 1945년 아버지를 따라 할아버지가 살던 포항시 북구 흥해읍 덕성1리(덕실마을·당시는 영일군)에 첫발을 디뎠다. 그때 이명박은 4살이었다. 이상득은 공부를 매우 잘했다. 포항중학교 시절에 줄곧 선두를 다퉜으며, 동지상고(현 동지고) 졸업 때는 수석을 차지했다. 가난했던 이홍우 부부는 7명의 자녀 중 이상득 뒷바라지에 매달렸다. 부부는 이를 위해 셋째 아들인 이명박의 고교 진학을 말렸으며, 이상득이 1957년 서울대(경제학과)에 입학할 즈음에는 이명박을 포항에 남겨놓고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이명박은 동지상고 야간을 겨우 마친 뒤 부모가 있는 서울로 와서도 이태원시장에서 청소 리어카를 끄는 등 궂은일을 해야 했다. 이상득이 이명박을 본격적으로 챙긴 것은 1961년 한국 나이론(코오롱)에 입사해 경제적 여유가 생긴 뒤부터로 보인다. 이상득은 1964년 이명박이 고대총학생회장 권한대행 시절 6·3 시위 주도로 경찰의 수배를 받을 때 동생에게 도피처와 자수를 주선하는 등 보호자 노릇을 했다. 두 사람을 잘 아는 한 정치권 인사는 “형 때문에 어릴 때 피해를 봤다는 생각도 있지만, 코오롱에 취직한 형 덕분에 대학 시절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이 대통령은 형을 상당히 어려워한다”고 말했다. 대선 직전 여러 사람이 전략가인 윤여준을 데려오자고 이명박에게 건의하자, 이명박이 “형님한테 먼저 물어보라”고 한 적이 있다고 당시 캠프 관계자는 전했다. 이상득이 윤여준을 싫어하니 미리 ‘인준’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영포라인의 또다른 한 축인 최시중은 1937년 구룡포에서 태어났다. 구룡포는 일제시대에는 동해안 최대의 어업전진기지로 일본인 집단거류지가 크게 있었을 정도로 번성했다. 최시중의 옛집은 일본인 집단거류지 근처에 있었다. 포항시는 일본식 가옥 80여채가 남아 있는 이 동네를 근대역사문화거리로 지정했다. 기자가 지난주 현지에 갔을 때 골목길 포장 등 정비작업이 한창이었다. 최시중도 어린 시절 여섯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소년 가장이 돼 매일매일 생존 전쟁을 벌였다. 최시중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 최민석(1980년 작고)이 쌍끌이배 망루에서 고기떼를 찾다가 떨어져 하반신이 마비됐기 때문이다. 이명박이 어머니를 도와 죽도시장에서 엿 장사, 뻥튀기 장사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최시중은 구룡포 선창가에서 어머니와 함께 호박떡을 구워 팔았다. MB와 최시중, 불우한 어린 시절이 통했다 최시중과 이명박의 멘토-멘티 관계는 이상득을 통해 맺어졌다. 서점 점원과 입주 가정교사 등으로 힘겹게 고교(대구 대륜고)를 마치고 1957년 서울대(정치학과)에 들어간 최시중은 같은 영일 출신인 이상득을 만나 친구가 됐다. 둘은 사회에 나와서도 사무실이 광화문 근처에 있어 자주 만났다. 1970년대 중반쯤 <동아일보> 기자이던 최시중은 유명세를 타고 있던 이상득의 동생을 만났다. 1965년 현대건설에 입사한 이명박은 29살 나이에 이사가 되는 등 초고속 승진을 하고 있었다. 최시중은 2008년 1월 <월간중앙> 인터뷰에서 “1970년대 중반 이 부의장에게 잘나가는 동생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한번 보자고 해서 알게 됐다”며 “이 당선자 형제와는 포항이라는 지역에서 서로 최하층 바닥인생에서 성장했다는 공통점이 있어 별로 설명이 필요 없는 사이다. 감각적으로 공유하는 것이 있다”고 말했다. 이상득-최시중-이명박 3인의 ‘감각적 공유 관계’는 1980년대 말 이후가 되면서 ‘정치적 동지 관계’로 변한다. 이상득은 1988년 코오롱상사의 대표이사를 그만두고 13대 총선에서 민정당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한다. 이를 계기로 <동아일보> 정치부장과 정치담당 논설위원으로 있던 최시중이 정치적 조언과 자문을 하게 된다. 이런 그의 역할은 1994년 한국갤럽 회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계속된다. 이들과 사이가 안 좋은 정두언 새누리당 의원조차 최시중에 대해 “오랫동안 훈련된 정치적 감각이 있어 전략적 판단이 비교적 정확했고, 흐름을 잘 짚었다”고 말했다. 최시중은 처음에는 친구 이상득을 자문했지만, 1992년께부터는 ‘이명박 키우기’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그해 대선 때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의 결별, 1995년 민자당 서울시장 경선 도전 등 이명박의 주요 정치적 갈림길마다 최시중이 곁에 있었다. 이명박은 15대 총선 때의 선거비용 7억여원을 누락한 사실을 폭로한 비서 김유찬을 국외로 도피시킨 것과 관련해 범인 은닉죄로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의원직을 상실(1999년)한다. 이 일로 미국에 떠돌다 귀국한 이명박이 정계에 복귀할 때 서울시장 출마(2002년) 쪽으로 유도한 것도 최시중이었다. 정치공백을 단번에 만회해서 2007년 대선으로 곧바로 가자는 전략이었다. 최시중은 2006년 6월 초 갤럽 회장 신분인 상태에서 이명박 대선준비 작업에 참여했다. 그는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이명박을 택한 이유에 대해 “제대로 된 대통령을 만들고 싶었다. 내가 정치를 안 한 한풀이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명박의 정계진출 이후에는 이상득도 동생 밀어주기에 나섰다. 박영준은 이 과정에서 등장했다. 대우그룹 기획조정실에서 일하던 박영준은 1995년 이상득 비서관으로 정치권에 발을 내딛는다. 신한국당 정책조정위원장이 된 이상득은 김우중 대우그룹회장한테 “실물경제를 알고 일을 잘하는 사람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해서 박영준을 소개받았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박영준이 일을 빨리 익혀 이상득 의원으로부터 곧 신임을 받았다”고 말했다.
2002년 이명박의 서울시장 선거를 도운 박영준은 서울시에서 일하고 싶어 했으나, 이상득이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이에 박영준은 이명박 주변 사람들에게 “평생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 이 시장한테 나를 데려다 쓰게 얘기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새누리당 한 의원의 증언이다. 신분 상승을 향한 박영준의 이러한 욕망은 2005년 서울시 정무국장이 됨으로써 마침내 실현됐다. 대선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한 이명박도 고려대 후배이자 형님 사람인 박영준을 믿을 만했을 것이다. 당시 서울시에서 근무했던 한 인사는 “정무적인 결정이나 논의는 이 시장이 정무국장이던 박영준과 주로 하는 등 실무적으로 신뢰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또다른 한 인사는 “박영준이 아랫사람과 티격태격 다투기만 했지 서울시에 있을 때는 별 볼 일이 없었다”고 말했다.
‘야인’ 박영준 방 앞엔 사람들의 행렬
박영준이 이명박의 눈에 찼다는 신호가 나타난 것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였다. 박영준은 이명박 경선캠프였던 안국포럼 때 처음에는 내근을 하다가 중간부터 외근 쪽으로 돌았다. 동서대 교수인 김대식 등과 함께 지방을 다니면서 외곽조직을 만드는 일을 했다.
내부 사정을 아는 한 인사는 “당시 박영준이 비서실장 비슷하게 설치다가 선배급 인사들한테 혼이 난 뒤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바깥으로 나돌았다”고 말했다. 어쨌든 이때 만든 조직은 본선 때 선진국민연대로 공식적으로 출범한다. 지방 강연 등을 다니면서 박영준 조직원들의 환대를 경험했던 이명박은 2007년 8월20일 경선에서 박근혜를 이긴 날 용산빌딩에서 해단식을 하면서 딱 두 사람의 이름을 들었다. 이명박은 “얼굴이 새까맣게 탈 정도로 고생했다”며 박영준과 김대식을 칭찬했다.
이후 박영준의 행로는 탄탄대로였다. 17대 대선 다음날인 2007년 12월20일 아침 이명박은 가회동 자택으로 박영준을 불러 인수위 비서실을 총괄하라고 지시했다. ‘실무적 총괄’이라는 게 대체적인 해석이었지만, 박영준에게 본격적인 힘이 실리기 시작한 신호탄이었다. 인수위 초반 실세는 이명박의 오른팔이었던 정두언이었다.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지낸 정두언은 인수위 인선을 도맡아 했다. 박영준을 비서실 총괄팀장에 넣어준 것도 정두언이었다. 대선 다음날 박영준이 정두언을 만난 자리에서 “앞으로 선진국민연대 사람들을 많이 챙겨달라”고 부탁하자, 정두언이 “그럼 당신이 들어와서 직접 하라”며 총괄팀장 자리를 맡겼다는 게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영포라인이 권력을 독점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재오·정두언 등 수도권 라인의 힘이 막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수위가 출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두언이 몰락하기 시작한다. 당선자와 같은 층에 있던 정두언의 사무실이 다른 층으로 옮겨갔다. “호남 사람이다, 아내가 그림 장사로 떼돈을 벌고 있다는 등의 각종 음해가 영포라인으로부터 쏟아졌고, 이에 대해 당선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스스로 뒤로 빠졌다”고 정두언은 말했다. 하지만 정두언이 이명박 형제의 눈 밖에 난 결정적 계기는 따로 있었다. 그즈음 그는 이명박한테 불려가 1시간 동안이나 심하게 야단을 맞았다. 당시 국세청장이던 한상률한테 이전 정권 때 국세청에서 만든 ‘이명박 형제 파일’을 내놓으라고 요구한 것과 관련해 “왜 쓸데없는 일을 하느냐”는 질책을 받은 것이다. 자신들의 약점이 정두언의 손에 들어갈까 봐 두려워했을 것이라는 게 인수위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정두언이 떠난 대신 박영준이 ‘믿을 만한 사람’으로 자리매김됐다. 박영준은 정두언 사람들을 철저히 배제하고, 자기 사람을 심고는 조각 작업을 홀로 진행했다.
박영준은 ‘권력 사유화’의 주역이라는 정두언의 공격을 받고 2008년 6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청와대를 떠났지만, 영포라인이 떠받치는 그의 힘은 약해지지 않았다. 공기업 간부를 했던 한 인사는 “당시 용돈에 보태 쓰라고 100만원이 든 봉투를 들고 박영준을 위로하러 간 적이 있다”며 “그가 당시 거주하다시피 한 강북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위층의 일식당으로 오라는 연락이 와서 갔더니 여러 사람이 대기하고 있더라”고 말했다. 실제로 박영준은 야인 시절인 이때 포스코 회장 후보들인 정준양, 윤석만을 만나 사실상의 ‘면접’을 하는가 하면, 포스코의 배후 실력자인 박태준 부부와도 만나 포스코 회장 선임을 자신의 뜻대로 주도한다. 이명박 형제를 잘 아는 한 인사는 “이상득 의원은 포항이 지역구임에도 과거 정권 때 포스코로부터 냉대를 많이 받아 한이 많았다. 따라서 포스코는 이 의원의 관할구역이라고 봐야 한다”며 “박영준은 에스디(SD·이상득 약칭)의 뜻을 수행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포라인 비리 수사는 이제부터 시작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은 영포라인의 국정 농단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가장 잘 보여준다. 이 기구는 형식적으로는 총리실 산하에 있었지만, 기획총괄과장 진경락이 작성한 문건에 있듯이 “브이아이피(VIP)께 일심으로 충성하는 비선을 통해 총괄 지휘”가 이뤄졌다. 충성하는 비선은 곧 영포라인이었다. 청와대에는 고용노사비서관이었던 이영호와 그의 아래에서 행정관으로 일했던 최종석은 포항 출신이었다. 당시 청와대 민정2비서관이었던 이강덕도 포항이 고향이다. 청와대 하명을 받아 민간인 불법사찰에 직접적으로 연루됐던 공직윤리지원관 이인규를 비롯해 김충곤(점검1팀장), 김화기(점검1팀 조사관) 등 윤리지원관실의 핵심인물들도 모두 영포라인이다. 진경락도 포항 문화권인 경주에서 고등학교를 나오고, 이영호 및 이인규와 각각 청와대와 노동부에서 같이 일해 손발을 맞춘 준영포라인이다.
공직윤리지원관실 운영의 몸통이라고 자처한 이영호는 애초 선진국민연대 출신으로 알려졌지만 그가 이명박, 박영준과 인연을 맺은 것은 서울시장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금융노련 조직본부장 등을 지낸 이영호는 서울시의 노정협의 과정에서 이명박과 처음으로 만났다. 구룡포 출신의 그는 업무 과정에서 정무국장이던 박영준과도 영포를 고리로 쉽게 가까워졌다. 특히 그는 2007년 대선 때 한나라당과 한국노총의 정책협의를 성사시키면서 이명박의 눈에 들었다. 2009년 9월 청와대에서 다른 비서관실 행정관에게 욕설을 퍼붓고, 이를 말리던 정책실장 윤진식 등에게도 큰소리를 칠 정도로 행패를 부릴 수 있었던 배경이 이때 형성됐다. 노동부 감사관을 지낸 이인규는 최시중의 줄을 잡았다. 구룡포 출신의 한 인사는 “이인규가 대선 승리 이후에 최시중을 찾아가서 청와대 근무 등 인사 청탁을 했다”며 “그 결과 총리실로 갔는데 그 줄이 동아줄은커녕 썩은 줄이었다”고 말했다.
영포라인의 독식과 전횡은 과거 어느 정권의 실세그룹보다 화려했지만 몰락도 처참하다. “물이 넘치면 제방이 되고, 바람이 불면 병풍이 되겠다”며 이명박 지킴이를 자처하던 최시중은 지난달 “뭔가 많이 잘못됐다”는 말을 남기고 감옥에 갔다. 국회의원 보좌관에서 이명박 정권 최고 실세로 화려하게 변신했던 박영준도 지난 8일 구속됐다. 그는 올해 초까지만 해도 언론 인터뷰에서 “감방 갈 일 안 했다”고 큰소리쳤으나, 결국 “죄송하다”고 고개 숙였다. 최시중과 박영준은 각각 국외 도피중인 ‘폭탄’도 여전히 안고 있다. 최시중의 양아들로 돈심부름을 한 것으로 알려진 정용욱(방송통신위원회 정책보좌역)과 박영준의 돈 관리인이라는 의혹을 사는 이동조(제이엔테크 회장)가 들어올 경우 불똥이 어디까지 튈지 아무도 모른다. 영포라인의 실무자들인 이영호, 최종석, 김충곤 등도 모두 쇠고랑을 찼다. 또 ‘영일대군’ 이상득도 비서 계좌에서 나온 7억원 괴자금과 저축은행 의혹 건 등으로 검찰의 수사대상에 올라 있다.
본인들만 몰랐을 뿐 몰락의 씨앗은 이미 영포라인이 형성될 때부터 내부에서 싹트고 있었다. 최시중에게 파이시티의 돈을 전달했던 브로커 이동률씨는 구룡포 및 고교 후배로 최시중의 오랜 측근이었다. 이동률은 박영준도 서울시 시절부터 소개받아 파이시티 인허가와 관련한 청탁을 수시로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동조도 이상득 보좌관 시절부터 박영준을 포항에서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박영준은 이동조를 포스코 회장 면접 때 데리고 감으로써 포스코 쪽에 알아서 하라는 ‘신호’를 줬다. 영포라인들끼리 끌어주고 밀어주는 비밀 거래가 오래된 셈이다.
영포라인의 부패를 설명해줄 수 있는 다른 단초는 청계천 공사 초기의 일화다. 어느 휴일 이명박은 서울시 고위관계자들을 청계천이 보이는 한 빌딩 사무실에 불러 회의를 주재했다. 중간 휴식 시간에 이명박은 밖을 내다보면서 “지금은 긴가민가하지만 고가가 철거되고 청계천이 복원되면 이 주변 땅값은 확 뛸 것이다. 돈을 빌려서라도 땅이나 빌딩에 투자하라”고 말했다. 당시 한 참석자의 증언이다. 불법이나 편법을 권한 것은 아니지만, 이명박의 낮은 공적 마인드를 잘 보여주는 예다. 그런 보스를 향해 ‘일심으로 충성’했던 영포라인의 비리 노출은 이제부터 시작일지 모른다.
포항/김종철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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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많이 잘못됐다”
정권말 비리 발목잡혀 감옥행
이상득은 수사 선상 올라 이명박 정권은 2008년 출범 초 ‘강부자’(서울 강남지역의 부자) 또는 ‘고소영’(고려대, 소망교회, 영남) 정권으로 불렸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적확하지 않은 별명이었다. 처음부터 인구 53만명의 중소도시인 포항 출신 인사들이 중심이 된 ‘영포정권’이었다. ‘영포’는 이명박 대통령의 고향인 경북 영일·포항에서 따온 말이다. 지금의 포항시는 원래 영일군이었다. 1949년 영일군의 읍에서 시로 승격한 포항시는 1973년 포항제철이 들어선 뒤 급격히 성장해, 1995년 모체인 영일군을 흡수·합병했다. 영일이 포항이자 포항이 영일이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첫해인 2008년 연말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열린 ‘영포회’ 송년회는 영포정권의 한 단면을 보여줬다. 90명에 이르는 참석자들은 이 자리에서 방송통신위원장 최시중의 선창으로 “이대로!” “나가자!”를 외쳤다. “이대로”는 “이명박을 대통령으로”의 줄임말로, 2007년 대선 때 이명박 캠프의 구호였다. 포항 출신 5급 이상 공직자인 이들은 스스로 ‘호시절’임을 실토했다. “물 좋은 때 고향 발전을 못 시키면 죄인이 된다.”(박승호 포항시장) “속된 말로 동해안에 노났다. 우리 지역구에도 콩고물이 떨어지고 있다.”(강석호 국회의원/영양·영덕·봉화·울진군) “어떻게 하는지 몰라도 예산이 쭉쭉 내려온다.”(최영만 포항시의회 의장) 영포라인의 정점에는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의원(전 국회부의장)과 멘토인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있다. 이상득 의원은 별도의 직책을 맡지는 않았지만, ‘영일대군’ ‘상왕’ ‘만사형통’으로 불릴 정도로 국정 운영 전반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초기 내각과 청와대, 정보기관 등에는 ‘이상득 사람’이 즐비하게 포진했다. 초대 총리 한승수, 기획재정부 장관 강만수 등은 13대 국회 때부터 이상득과 아주 가깝게 지낸 인물들이다. 초대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 박영준과 정무1비서관 장다사로는 각각 이상득 의원 보좌관과 부의장 비서실장을 지냈다. 코오롱그룹 출신인 국정원 기조실장 김주성도 이상득 인맥이다. 대선 때 엠비 캠프 ‘6인회의’의 핵심 멤버였던 최시중은 지난 4년 동안 방송통신 쪽에서 전권을 휘둘러 ‘방통대군’으로 불렸다. 정권 초반 한국방송과 문화방송(MBC), 와이티엔(YTN), 연합뉴스 사장 등 공영(성) 언론의 사장을 엠비맨으로 강제 교체했다. 또 다수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동아일보>, <매일경제>에 종편채널을 무더기로 허용하고, 이들에게 각종 특혜를 줬다. 이상득 최시중이 영포라인의 ‘쌍끌이’ 기관차였다면, 박영준의 역할은 총간사였다. 박영준은 경북 칠곡 출신이지만, 1995년 국회 비서관으로 이상득과 인연을 맺은 뒤 2005년 서울시 정무국장으로 옮기면서 이명박의 신임을 받았다. 두 형제와의 10여년에 걸친 긴밀한 관계로 그는 범 영포라인으로 분류된다. 그는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 시절에는 내각과 공기업 기관장 및 감사 인사 등을 총괄해 ‘왕비서관’으로 불렸다. 2009년 1월 국무차장이 된 이후에는 ‘왕차관’으로 국정의 모든 부분에 개입했다. 이영호(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 이인규(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 등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불법사찰을 주도했던 핵심 실무자들도 박영준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형제의 고향 포항에선 “분위기가 뒤숭숭” 지난 8일 찾은 포항에서 영포회원들이 왜 “이대로! 나가자!”를 희망했는지를 일부 엿볼 수 있었다. 올해 1월에 개통한 38km의 국도대체우회도로(남구 동해면~북구 흥해읍 영일만항)에는 시원스레 차들이 달렸으며, 울산~포항 고속도로(2014년 완공 예정)와 포항~영덕 고속도로(2015년 완공 예정)의 공사도 곳곳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이들은 ‘형님 예산’으로 비판받긴 했지만, 철강 등 산업물동량을 원활하게 수송하기 위해 지역에서 오랫동안 요구했던 숙원사업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다지 통행량이 많지도 않은 구룡포에서 호미곶까지의 4차선 도로 신설 등은 순전히 영포정권의 힘인 듯했다. 건설공사가 한창인 포항~삼척 사이의 동해중부선 철도도 경제성보다는 영포라인의 고향발전 의지가 더 많이 실린 것으로 보였다. 겉으로의 화려함과 달리 포항의 민심은 좋지 않았다. 죽도시장에서 만난 상인들은 한결같이 “장사가 너무 안된다”고 말했다. 구룡포 한 낚시집에서 만난 김아무개(45)씨는 “먹고 살기 바쁜데 이상득이든 최시중이든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포항와이엠시에이(YMCA) 사무총장 서병철(47)은 “이익이 대폭 줄어든 포스코가 최근 돈줄을 졸라매는 바람에 시내 경기가 안 좋은데다가 영포라인을 둘러싼 비리 의혹에 김형태 국회의원 당선자의 성추문까지 겹쳐 시민들이 심리적으로 동요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영포라인의 힘은 대통령 이명박과의 관계에서 비롯됐다. 형님 이상득은 어릴 때부터 이명박 집안의 희망이자 기둥이었다. 이상득은 일본 오사카에서 1935년 이홍우(1981년 작고)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까지 일본에서 자랐다. 해방 직후인 1945년 아버지를 따라 할아버지가 살던 포항시 북구 흥해읍 덕성1리(덕실마을·당시는 영일군)에 첫발을 디뎠다. 그때 이명박은 4살이었다. 이상득은 공부를 매우 잘했다. 포항중학교 시절에 줄곧 선두를 다퉜으며, 동지상고(현 동지고) 졸업 때는 수석을 차지했다. 가난했던 이홍우 부부는 7명의 자녀 중 이상득 뒷바라지에 매달렸다. 부부는 이를 위해 셋째 아들인 이명박의 고교 진학을 말렸으며, 이상득이 1957년 서울대(경제학과)에 입학할 즈음에는 이명박을 포항에 남겨놓고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이명박은 동지상고 야간을 겨우 마친 뒤 부모가 있는 서울로 와서도 이태원시장에서 청소 리어카를 끄는 등 궂은일을 해야 했다. 이상득이 이명박을 본격적으로 챙긴 것은 1961년 한국 나이론(코오롱)에 입사해 경제적 여유가 생긴 뒤부터로 보인다. 이상득은 1964년 이명박이 고대총학생회장 권한대행 시절 6·3 시위 주도로 경찰의 수배를 받을 때 동생에게 도피처와 자수를 주선하는 등 보호자 노릇을 했다. 두 사람을 잘 아는 한 정치권 인사는 “형 때문에 어릴 때 피해를 봤다는 생각도 있지만, 코오롱에 취직한 형 덕분에 대학 시절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이 대통령은 형을 상당히 어려워한다”고 말했다. 대선 직전 여러 사람이 전략가인 윤여준을 데려오자고 이명박에게 건의하자, 이명박이 “형님한테 먼저 물어보라”고 한 적이 있다고 당시 캠프 관계자는 전했다. 이상득이 윤여준을 싫어하니 미리 ‘인준’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영포라인의 또다른 한 축인 최시중은 1937년 구룡포에서 태어났다. 구룡포는 일제시대에는 동해안 최대의 어업전진기지로 일본인 집단거류지가 크게 있었을 정도로 번성했다. 최시중의 옛집은 일본인 집단거류지 근처에 있었다. 포항시는 일본식 가옥 80여채가 남아 있는 이 동네를 근대역사문화거리로 지정했다. 기자가 지난주 현지에 갔을 때 골목길 포장 등 정비작업이 한창이었다. 최시중도 어린 시절 여섯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소년 가장이 돼 매일매일 생존 전쟁을 벌였다. 최시중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 최민석(1980년 작고)이 쌍끌이배 망루에서 고기떼를 찾다가 떨어져 하반신이 마비됐기 때문이다. 이명박이 어머니를 도와 죽도시장에서 엿 장사, 뻥튀기 장사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최시중은 구룡포 선창가에서 어머니와 함께 호박떡을 구워 팔았다. MB와 최시중, 불우한 어린 시절이 통했다 최시중과 이명박의 멘토-멘티 관계는 이상득을 통해 맺어졌다. 서점 점원과 입주 가정교사 등으로 힘겹게 고교(대구 대륜고)를 마치고 1957년 서울대(정치학과)에 들어간 최시중은 같은 영일 출신인 이상득을 만나 친구가 됐다. 둘은 사회에 나와서도 사무실이 광화문 근처에 있어 자주 만났다. 1970년대 중반쯤 <동아일보> 기자이던 최시중은 유명세를 타고 있던 이상득의 동생을 만났다. 1965년 현대건설에 입사한 이명박은 29살 나이에 이사가 되는 등 초고속 승진을 하고 있었다. 최시중은 2008년 1월 <월간중앙> 인터뷰에서 “1970년대 중반 이 부의장에게 잘나가는 동생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한번 보자고 해서 알게 됐다”며 “이 당선자 형제와는 포항이라는 지역에서 서로 최하층 바닥인생에서 성장했다는 공통점이 있어 별로 설명이 필요 없는 사이다. 감각적으로 공유하는 것이 있다”고 말했다. 이상득-최시중-이명박 3인의 ‘감각적 공유 관계’는 1980년대 말 이후가 되면서 ‘정치적 동지 관계’로 변한다. 이상득은 1988년 코오롱상사의 대표이사를 그만두고 13대 총선에서 민정당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한다. 이를 계기로 <동아일보> 정치부장과 정치담당 논설위원으로 있던 최시중이 정치적 조언과 자문을 하게 된다. 이런 그의 역할은 1994년 한국갤럽 회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계속된다. 이들과 사이가 안 좋은 정두언 새누리당 의원조차 최시중에 대해 “오랫동안 훈련된 정치적 감각이 있어 전략적 판단이 비교적 정확했고, 흐름을 잘 짚었다”고 말했다. 최시중은 처음에는 친구 이상득을 자문했지만, 1992년께부터는 ‘이명박 키우기’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그해 대선 때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의 결별, 1995년 민자당 서울시장 경선 도전 등 이명박의 주요 정치적 갈림길마다 최시중이 곁에 있었다. 이명박은 15대 총선 때의 선거비용 7억여원을 누락한 사실을 폭로한 비서 김유찬을 국외로 도피시킨 것과 관련해 범인 은닉죄로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의원직을 상실(1999년)한다. 이 일로 미국에 떠돌다 귀국한 이명박이 정계에 복귀할 때 서울시장 출마(2002년) 쪽으로 유도한 것도 최시중이었다. 정치공백을 단번에 만회해서 2007년 대선으로 곧바로 가자는 전략이었다. 최시중은 2006년 6월 초 갤럽 회장 신분인 상태에서 이명박 대선준비 작업에 참여했다. 그는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이명박을 택한 이유에 대해 “제대로 된 대통령을 만들고 싶었다. 내가 정치를 안 한 한풀이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민간인 불법사찰이 처음 불거졌던 2010년 7월 검찰 관계자들이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에서 압수수색을 마친 뒤 빠져나오고 있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작성한 사찰 지휘체계 관련 문서(맨 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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