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뉴욕으로 가는 전용기에서 첫 밤을 보냈을 님의 감회를 상상해봤습니다. 취임 후 첫 한-미 정상회담, 특히 앞으로 5년간 미국의 한반도 정책과 우리 대북정책의 큰 틀이 정해지는 회담을 앞두고 있었으니, 잠이나 제대로 잤을까 싶지만, 제가 그려본 것은 그런 국사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이런 개인사와 관련한 감회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오른 지 얼마 만에 전용기에 올랐으며, 그 사이 그 숱한 우여곡절과 인생유전이라니!
개인사의 그 엄청난 파노라마는 사실 저 같은 범인을 삼키고도 남을 파도와 같은 것입니다. 비명에 간 어머니를 대신해서 섰던 퍼스트레이디의 자리, 그 때문에 아버지 손에 이끌려 올랐던 대통령 전용기, 그런 4년여의 세월 뒤 어느 날 비행기고 집이고 몽땅 잃고 졸지에 사고무친이 되어 후미진 곳에 묻혔던 시절, 그리고 절치부심과 국회 입성, 그로부터 18년 뒤 청와대를 되찾고, 전용기에 올라 대한민국의 운명을 놓고 미국 대통령과 담판을 벌이게 됐습니다. 참으로 기구하고 특별한 운명입니다.
부친에게 미국은 애증이 병존하는 이중적 존재였습니다. 의지해야 할 동맹이고, 사사건건 구속하는 신국이고, 엎드려 충성해야 할 대형이고, 그렇다고 인정은커녕 얕잡아보는 상관이었습니다. 처음 부친이 미국에 방문했을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미국은 그에게 조건, 곧 몇 가지 조공까지 요구하고, 이를 수락하자 방미를 허용했습니다. 부친은 쿠데타를 추인받아야 했기에 그런 모욕과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죠.
이렇게 애증이 함께하고, 원심력과 구심력이 공존하는 관계이지만 부친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정권 연장의 욕망을 제어할 수 없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선 미국의 동의를 받아야 했고, 그러자면 굴욕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더럽고 치사하고 아니꼬워도 조아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핵 개발 혹은 대북 선제공격 등의 신호로 저들을 긴장시키게 하곤 했지만, 미국은 우리의 국가 안보와 경제 안정은 물론 정권 안보의 블랙박스를 쥐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1979년 10월26일 부친의 피살에까지 개입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전지전능했습니다. 지금도 당시 미국 정보기관의 비밀 해제된 자료의 공개를 요청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미국과의 관계에서 부친이 겪은 이런 설움은 쿠데타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3선 개헌에 이어 깡패국가를 선언한 친위쿠데타 유신정변으로 영구집권을 꾀했습니다. 결국 총으로 권력을 잡고, 총으로 정권을 연장하고, 총으로 영구집권을 획책한 것이, 부친으로 하여금 미국을 신의 나라로 떠받들게 한 것입니다. 총구는 권력의 산실이었지만, 동시에 굴욕의 숙명도 거기서 나왔습니다.
이제 님은 부친이 부정했던 적법 절차를 거쳐, 부친보다 의연하게 미국 대통령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총과 권력, 유신 군대 이야기를 끄집어내니, 별로 달갑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꺼내는 건 요즘 군 수뇌부의 행태 때문입니다. 과연 군 통수권자가 누구인지 모를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죠. 님은 부정하겠지만 지금도 군 수뇌부, 특히 육군 수뇌부를 움직이는 건 12·12 군사반란과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5·18 광주민주항쟁의 유혈 진압과 권력 찬탈을 주도했던 자들의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군사반란 옹호자들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엊그제 <한겨레>를 보면 이런 기사가 나옵니다. 작지만 상징적인 일입니다.
해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리기 위해 초·중·고교생을 대상으로 하는 글, 그림, 사진 공모전이 있습니다. 공모작 중 수작에는 서울보훈청장 이름의 상이 주어집니다. 5·18 민주화운동이 국가 기념행사이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올해 서울보훈청장상이 주어질 시와 그림에서, ‘총성’이나 ‘피 냄새’ 등의 시어가 있다는 이유로, 혹은 그림 속에 군인이 민간인에게 총을 쏘는 장면이 있다고 협의(사실상 교체이겠죠)를 요구했다는 겁니다. 아니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이 주제이자 소재인데 거기서 피와 총, 군이 등장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을 하라는 겁니까. 이거 제정신인가요? 지난해엔 전두환의 전재산 29만원을 풍자한 작품이 청장상을 수상하자, 펄펄 뛰던 사람들입니다. 국가보훈처는 군 출신들에 의해 휘둘리는 조직입니다. 이들에게 주군은 여전히 전두환씨와 군사반란자들인가요.
이런 일도 있었죠. 4월 중순이었습니다. 고 김오랑 중령 아시죠? 12·12 군사반란군은 당시 끝까지 반란군에 투항하지 않던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러 사무실로 들이닥칩니다. 특전사 가운데 최고의 전투력을 자랑한다던 3공수여단 정치장교들이었습니다. 그때 권총 한 자루로 정 사령관을 지키던 이가 김 중령입니다. 그는 반란군이 쏜 총탄 6발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졌습니다. 누가 보아도 참군인의 표상입니다. 그리고 그를 죽인 자들(그 수괴는 전두환이었습니다)은 범죄자입니다. 군의 생명인 명령을 어기고 위계를 뒤엎은 즉결처형 대상입니다.
그런데 김관진 국방부 장관은 국회 국방위가 여야 합의로 권고한 김 중령에 대한 무공훈장 추서 결의를 거부했습니다. 국방위는 이전에도 두 차례 이런 결의안을 통과시킨 바 있었으나 국방부와 군 수뇌는 한사코 거부했습니다. 김 장관은 김 중령이 전투나 전투에 준하는 직무 수행을 한 바 없다고 핑계를 댔지만, 반란군에 맞서 싸우다 산화한 것이 그런 직무이자 무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반란군은 적입니까, 아군입니까.
더 가관인 것은 반란을 현장에서 실행에 옮겼던 수십명의 장교들은 무공훈장을 받았다는 겁니다. 2006년 정부가 서훈을 취소한 사람은 실형 선고를 받은 전두환, 노태우 등 반란 수뇌부 14명뿐이었습니다. 지휘관에게 총부리를 들이대고 체포하고 총을 쏘아대는 건 무공으로 인정하지만, 지휘소를 사수하려다 순직한 이는 사고사 정도로 처리하는 게 지금의 군 수뇌부입니다. 12·12 군사반란의 ‘정신’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뇌물 수수로 2년6개월 실형을 선고받은 안현태씨(전 전두환 대통령 경호실장) 아시죠? 이 사람은 보훈처가 엉터리 심사를 거쳐 국립묘지에 안장하도록 했습니다. 법은 금고 1년 이상의 실형을 선고받으면 국립묘지에 묻힐 수 없도록 하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심의에서 두 차례나 거부되자, 군 수뇌부가 서면심사라는 편법을 동원해 그 본성을 관철한 것이죠.
님은 국민의 선택으로 대통령에 올랐습니다. 부친 이래로 군 수뇌부 사이엔 국민의 선택을 총으로 뒤엎는 군사반란을 숭상하는 피가 흐릅니다. 일소해야 할 정치인들은 눈치만 봅니다. 부친은 국민의 선택을 전복하는 쪽이었지만, 국민 주권과 국민 선택에 의해 대통령에 오른 님은 그 반대쪽입니다. 역사 속에서 부녀는 맞선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공교로운 일입니다. 따라서 님이 해야 할 일은 부친을 극복하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군 통수권을 분명히 해 군사반란의 피를 깨끗이 청소해야 합니다. 아버지와 같은 불행한 군인이 다시 나와서는 안 됩니다. 부친이 그 말을 하며 눈물을 흘린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님은 이제 아비의 역사를 넘어서야 합니다. 어제 어린이와 약속했죠. “여러분의 꿈과 끼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신나고 안전한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그 출발은 모두가 주인 되는 세상을 지키는 일입니다. 순방길 건강 조심하시길 빕니다.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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