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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대통령실

저 끔찍한 슬픔의 봄은 언제나…

등록 2013-05-20 14:11

박근혜 대통령이 18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3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앞서 행방불명자 묘역을 방문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제공
박근혜 대통령이 18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3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앞서 행방불명자 묘역을 방문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제공
곽병찬 대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⑦
엊그제 현창을 때리는 빗소리가 밤새도록 그치지 않더니, 아뿔싸! 아침엔 모란꽃이 모두 종적을 감췄습니다. 꽃잎에 가려 있던 씨방만 홀아비처럼 구차하게 남았습니다. 개화하고 불과 일주일이나 됐을까요. 연등 같은 꽃망울이 진한 자줏빛을 드러내고부터는 열사나흘이나 됐을까요. 참으로 허망합니다.

그 향기 그윽했습니다. 퇴근 무렵 멀리 문간이 보이는 곳에까지 바람에 그 향기 실려와 가슴을 설레게 했습니다. 나는 집안에 곱고 우아하고 기품있는 왕녀를 모시고 있는 양 의기양양했습니다. 퇴근해선 그 곁에 한참을 서성거렸고, 해 뜨기 전 향기가 가장 맑다 하여, 눈만 뜨면 창문부터 열어젖혔습니다. 그런데 십일홍도 아니었으니, 모란이 지고 나면 ‘삼백예순 날 섭섭해 우옵내다’던 김영랑 시인의 애상이 떠오릅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그 시를 우물거리다 보면 돌부리처럼 걸리는 게 있습니다. 학창 시절 시험에도 자주 나오는 대목이죠. ‘찬란한 슬픔의 봄!’ 형용모순의 관계인 찬란하다와 슬프다라는 시어가 그의 시에선 절창의 조합으로 받아들여지는 까닭이지요.

어쩌면 님 역시도 올봄이 그러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열살 때부터 살던 청와대에서 쫓겨나다시피 떠난 지 35년 만에 그 주인으로 돌아왔고, 바로 엊그제까지만 해도 미국 의회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한-미 동맹 60주년’을 기념하는 연설을 했고, 세월의 주름살을 멀찌감치 물리쳐버린 아름다운 한복으로 멋진 자태를 세계에 뽐내기도 했죠. 저의 속없는 한 친구는 그걸 보고 이런 농담도 했죠. “예쁘면 무죄.”

그렇게 찬란한 오월이었는데, 믿고 또 믿었던 대변인이라는 사람이 세계인 앞에서 구정물을 쏟아부었으니, 참으로 ‘뻗어 오르던 보람’ 일거에 무너졌습니다. 물론 방미 전 조 단위의 미제 무기 구입 계획과 방미 중 미국의 최전방 군사기지로 편입을 뜻하는 미사일방어체제 구상 참여 가능성을 제시한 것을 두고, 지나치게 비싼 출장비였노라고 비판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부시를 만나기 위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전면개방을 헌상했던 것에 비교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속없는 친구의 말마따나, 님의 한복 패션은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님의 오월에 구정물을 퍼붓는 일은 윤씨로 그친 게 아니었습니다. 시인에게 오월이 찬란한 슬픔의 계절이었다면,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오월은 처절한 비탄의 계절입니다. 국가의 최고 무력인 국군이 광주에서 저의 어머니이자 아버지, 형제자매를 무자비하게 학살했던 때였으니까요. 님도 아시겠지만, 그해 5월21일 오후 1시 광주 도심인 전남도청 앞 광장, 도청의 확성기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계엄군은 집단 발포를 시작했습니다. 54명이 숨지고 500여명이 다치게 한 발포의 신호탄이 바로 애국가였던 것입니다.

5·18 기념식은 그렇게 죽고 다친 이들을 기억하는 행사입니다. 그들에게 애국가는 어떤 노래로 기억될까요. 그리고 그 유가족에게 애국가는 어떤 기억으로 다가올까요. 그날 국가는 애국가를 살상과 저주와 증오의 노래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런 기억이 지금도 생생한 분들에게 기념식 노래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다른 기념식처럼 애국가, 곧 집단 발포의 노래를 요구할 순 없을 겁니다. 그 노래를 시작으로 무수한 젊음이 오월의 꽃 사태처럼 스러져간 일을 기억하고, 그들이 가고자 했던 길, 이루고자 했던 뜻을 되새기는 노래여야 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슬픔 많은 이들에게서 그들의 노래를 빼앗습니다. 그건 또다른 국가 폭력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국가보훈처가 하는 짓을 모른 척해선 안 됩니다. 마음에도 없는 추념과 애도 그리고 다짐에 동참하라고 하는 건 아닙니다. 보훈처가 그런 짓을 하자, 군사반란과 정권 찬탈을 주도했던 신군부 잔당과 추종 언론들이 ‘5·18 민주화운동’을 뿌리부터 왜곡하는 짓을 살판이라도 난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 신군부의 확성기 노릇이나 했던 동아, 조선일보의 종편들이, 당시 신군부가 조작해 발표했던 북한군 개입설을 다시 들고나왔습니다. 심지어 북한군이 600명이나 투입됐다는 주장까지 내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의 군사반란 및 내란 사건 재판 과정에서 당시 계엄사령관이 번복했던 주장입니다. 그 주장이 비슷하게라도 맞다면, 계엄군, 특히 특전사는 침투한 북한군은 놔둔 채 시민만 골라 사살한 셈이었으니, 참으로 멍청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이들은 윤창중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종북세력의 기획이요 음모라고 떠들었습니다. 종북이 아니라 북한이 개입했다고 하지 않은 게 다행입니다. 그런 주장에 대한 여론이 워낙 좋지 않자 슬그머니 발을 뺐지만,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런 주장을 다시 정색하고 내세울지 모를 일입니다. 문제는 이런 자들이 님을 자꾸 수렁 속으로 끌고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초보적인 사실까지 왜곡하는 자들이 활개치는데 어떻게 100% 대한민국이 이루어질 것이며, 통합과 행복을 꿈꿀 수 있겠습니까.

모른 척하시면 안 됩니다. 군사반란 집단의 적자인 양 행동한 보훈처장을 방관하니, 그런 일들이 창궐한 것입니다. 찬란한 오월을 더 이상 추접하고 슬픈 오월로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김영랑 시인은 이런 봄날도 노래했습니다(‘내 마음 고요히 고흔 봄길 우에’에서). 때깔이 화사한 님의 그 한복 같기만 합니다. 그런 봄날을 꿈꿉니다.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가치
풀아래 우슴 짓는 샘물가치
내 마음 고요히 고흔 봄길 우에
오날 하로 하날을 우러르고 싶다
…”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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