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방문 이틀째인 28일 저녁 일이다. 박 대통령은 중국 내 정치 서열 2위인 리커창 총리와 면담하고 만찬을 함께했다. 면담 결과를 기다리던 기자들은 ‘이후 별도 브리핑은 없다’는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잠시 뒤 중국 관영 시시티브이(CCTV)는 두 사람의 면담 장면과 대화 내용을 보도했다. 한국 언론은 이를 인용해 보도할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 순방을 동행 취재하면서 중국 언론을 인용 보도하는 게 유쾌할 리 없지만, 절차상 문제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양국 정부가 설명하는 ‘내용’이 다르다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 다음날 아침 청와대가 낸 리커창 총리 면담 결과 보도자료는 전날 시시티브이가 내보낸 대화 내용과 달랐다. 그것도 핵심 내용에서 차이가 났다.
한반도 비핵화 문제의 해법과 관련해 리 총리는 “중국의 (한)반도 비핵화 입장은 일관, 명확, 확고하다. 조기에 6자회담을 재개해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리 총리는 ‘중국은 북한의 핵무기 보유는 반대하며,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기를 희망한다는 일관되고 확실한 입장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 ‘대화와 협상을 통해서 문제를 풀어가자’고 말했다”고 밝혔다. 리 총리가 언급하지 않은 ‘북한의 핵무기 보유 반대’ 부분이 추가되고, 그가 해법으로 강조한 ‘6자 회담 재개’는 빼버렸다. 북한의 진정성 있는 조처 없는 6자 회담 재개에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북핵 불용’ 원칙을 밝혀온 우리 정부가 중국 총리의 발언을 입맛에 맞게 왜곡한 셈이다.
27일 열린 정상회담 때도 같은 일이 있었다. 박 대통령은 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두 정상은 어떤 상황에서도 북한의 핵 보유는 용인할 수 없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고 말했지만, 이날 채택된 ‘한-중 미래비전 공동성명’에는 “양측은 유관 핵무기 개발이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고 밝혔을 뿐, ‘북한’이란 단어는 들어 있지 않았다. 이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중국이 북한의 비핵화와 관련해 얼마나 명확한 표현으로 북한을 압박하고 한국에 힘을 힘을 실어주느냐가 이번 정상회담의 최대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한-중 공동성명이나 중국 수뇌부의 발언을 보면, 중국 정부는 북한과의 관계를 고려해 직접 압박을 피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두 차례나 ‘중국이 북핵 불용에 동의했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성과를 강조하려고 문구를 ‘마사지’한 게 아니냐는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이를 의식했는지 청와대는 30일 정상회담 성과를 설명하는 자료에 이런 해석을 덧붙였다. “공동성명과는 별도로 실제 회담을 통해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 북한의 비핵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점’ 등에 대해 한-중 간 ‘사실상’ 공통된 인식을 달성했다.”
단어 한 개 자구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국제 외교무대에서, 자신들의 짐작을 상대국의 입장이라고 공표하는 게 과연 적절한 일일까?
석진환 기자
soulf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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