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15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가정보원 간첩 혐의 조작 사건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하면서도 남재준 국정원장의 책임은 묻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대통령이 검찰 수사 결과 발표 20시간 만에 남 원장에게 공식적인 ‘면죄부’를 준 것이다.
박 대통령은 국무회의 공개발언에서 “어제 검찰 수사 결과가 발표됐다. 유감스럽게도 국정원의 잘못된 관행과 철저하지 못한 관리체계에 허점이 드러나 국민께 심려를 끼쳐드리게 돼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국정원의 환골탈태’도 거듭 약속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이번에도 국정원 개혁을 위한 ‘칼자루’를 남 원장에게 맡겼다. 지난해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건으로 국정원 개혁 요구가 빗발쳤을 때 대처했던 방식과 같다. 당시 박 대통령은 “국정원 개혁을 반드시 이뤄낼 것”이라며 국정원 스스로 개혁안을 만들라는 ‘셀프 개혁’을 주문한 바 있다. 하지만 국정원은 이후 증거조작 의혹이 불거진 뒤에도 거짓 해명으로 일관했고, 국면 전환을 위한 정치개입도 서슴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결국 ‘남재준 국정원’ 때문에 또 한번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다.
이런 시행착오를 겪고서도 박 대통령은 이번에도 국정원을 향해 “또다시 국민들의 신뢰를 잃게 되는 일이 있다면 반드시 강력하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전날 사표를 수리한 서천호 국정원 2차장 선에서 문책을 마무리짓고, 정작 ‘셀프 개혁’에 실패해 국정원을 국기문란 기관으로 만든 남 원장은 감싸고 나선 것이다.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이 15일 오전 서울 내곡동 청사에서 “증거서류 조작 혐의로 국민 여러분께 심려 끼쳐 드리게 된 것을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고 말한 뒤 단상 옆으로 나와 고개를 숙이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박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주재하던 그 시각, 남 원장도 서울 내곡동 국정원 청사에서 “증거 서류 조작 의혹으로 국민께 심려를 끼쳐드린 점을 머리 숙여 깊이 사과드린다”며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남 원장은 “이런 위중한 시기에 국정원이 환골탈태해 새로운 기틀을 마련할 수 있도록 국민 여러분께서 기회를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린다”며 사퇴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도 이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출석해 “검찰이 증거능력 검증에 철저를 기하지 못해 (국정원이 제출한) 잘못된 증거를 (법정에) 제출하게 된 점을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청와대와 국정원, 법무부(검찰)가 같은 날 일제히 대국민 사과를 하며 사건 수습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정치권에선 남 원장에게 거듭 주어진 면죄부가 박 대통령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남재준 국정원’은 정상회담 회의록 공개 강행, 채동욱 검찰총장 혼외아들 의혹 개입 논란, 간첩 혐의 조작과 탈북자 정보 언론 제공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정치 현안에 개입한 ‘꼬리표’가 붙어 있다. 이후 정국에서 계속해서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게 불가피하다. 야당의 협조가 절실한 법안이 국회에 산더미처럼 쌓인 상황에서 야당의 ‘표적’인 그를 계속 곁에 두는 것 자체가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여당의 한 재선 의원은 “문책 시기는 대통령이 판단하겠지만, 남 원장은 지난해 이미 여러 부적절한 행동들로 (국회에서) 신뢰를 상당 부분 잃었다”고 지적했다. 대선 때 박 대통령 캠프에서 활동했던 한 여권 인사도 “남 원장은 박 대통령에게 너무 많은 부담을 주고 있다. 불과 1년 만에 북한이나 종북세력이 아닌 야권과 시민사회 전체를 적으로 만들어버린 정보기관장이 있었느냐”고 꼬집었다.
석진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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