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종범(57)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은 재정과 복지 분야를 전공했던 괜찮은 경제학자였습니다. 성향은 보수였지만, 진보와도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정치인 박근혜의 ‘경제 가정교사’였던 그는 2014년 6월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발탁됐습니다. 나라의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자리였습니다. 이어 지난 5월부터는 국가의 모든 업무를 관장하는 왕수석 자리인 정책조정수석을 맡았습니다. 그런 그가 대통령의 지시로 여러 불법행위를 저지른 혐의로 얼마 전 감옥에 갇혔습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은 2005년부터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다. 2012년 대선 때는 공약을 총괄하는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실무추진단을 만드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2013년 1월6일 당시 안종범 의원이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로부터 대통령직인수위 고용·복지분과위원 임명장을 받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안종범이 박근혜를 처음 만난 것은 2005년이었다. 성신여대 경제학과 교수인 강석훈과 함께였다. 미국 위스콘신대학교 동문이었던 두 사람이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에서 함께 안식년을 보내고 막 귀국한 직후였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안종범과 강석훈은 박근혜 측근 인사에게 비밀 캠프에 합류해달라는 요청받았을 때 처음에는 주저했다. “당 분위기로 볼 때 박근혜가 후보 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독재자의 딸 아니냐”고 거절했다. 하지만, 주변의 설득에 결국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그 뒤 안종범은 누구보다 열심히 박근혜를 위해 일했다. 어느 순간부터 박근혜에 ‘올인’하다시피 했다. 남덕우(2013년 작고) 전 국무총리가 팀장이었던 정책팀에서 김광두(당시 서강대 교수) 등과 함께 2007년 대선 공약을 만들었다. 이때 만든 게 바로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치는 세우자) 공약이었다. 줄푸세의 주요 아이디어는 총괄간사 격인 김광두가 대부분 냈지만, 안종범도 자신의 전공인 재정과 복지 분야에서 내용을 풍부히 만드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
안종범과 그의 가까운 사람들은 2007년부터 2012년까지 5년 동안 각종 개인 비밀번호로 0819를 사용했다. 후보 경선일로 잠정 결정됐던 8월19일(실제로는 8월20일로 변경)에 승리하자는 염원을 담았다. 2007년 당내 경선에서 이명박에게 박근혜가 진 뒤에는 패배를 잊지 말자는 뜻으로 번호를 계속 간직했다. 그는 2012년 당내 경선에서 승리한 뒤에야 5년간의 비밀을 봉인 해제했다.
안종범 전 수석이 교수 시절 안식년을 보내던 2005년 당시 미국 샌프란시스코 마라톤대회에 참석해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다. <머니투데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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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인 공부모임’의 주요 멤버
2007년 경선에서 패배한 뒤 박근혜를 돕던 전문가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교수들은 대부분 학교로 돌아갔다. 박근혜 대표 비서실장이던 유승민은 이때 사실상 박근혜와 결별했다. 안종범도 공식적으로는 학교로 복귀했다. 하지만 실제로 안종범은 박근혜에게 한발 더 다가갔다. 이명박이 대선에서 승리한 2007년 말 박근혜는 경선 때 자신을 도와줬던 정책팀의 핵심 인사 다섯명을 따로 불러 송년회를 열었다. 김광두, 신세돈(숙명여대), 김영세(연세대), 최외출(영남대), 안종범(성균관대) 등이 초청됐다. 정책팀 해단식을 명분 삼았지만, 사실상 ‘2012년 대선’을 향한 대장정의 출발점이었다. 이 자리에서 이른바 ‘5인 공부모임’이 탄생했다. 다섯명의 교수와 박근혜는 그때부터 격주로 한번씩 만나 경제를 비롯한 각 분야를 토론하며 공부했다. 5명은 사실상 박근혜의 분야별 과외교사였다. 이 공부모임에 빠짐없이 참여하는 사람이 한명 더 있었다. 박근혜의 보좌관인 이재만이었다.
이처럼 비밀리에 박근혜를 돕고 있던 안종범이 공개적으로 정치에 입문한 것은 대선을 1년 앞둔 2011년 말이었다. 선관위 디도스 공격 사건 등으로 위기에 빠진 한나라당이 박근혜 비대위 체제로 전환하면서였다. 경제학자 안종범은 비대위원장 박근혜에 의해 비대위 제2분과 자문위원으로 정당에 첫발을 들였다.
이때부터 안종범은 순풍에 돛 단 듯 승승장구했다. 2012년 3월에는 19대 총선 중앙선대위의 공약소통본부장을 맡았고, 결국 19대 비례대표 의원으로 선출됐다. 그해 7월에는 대선 경선 캠프에서 정책메시지본부장을 역임했다. 박근혜가 당 후보가 된 뒤에는 대선 선대위 기구의 하나인 국민행복추진위원회의 실무추진단장을 맡았다. 대선공약을 총괄하는 자리였다. 대선 뒤 대통령직 인수위원(고용·복지분과)과 경제수석(2014년 6월), 정책조정수석(2016년 5월)으로 발탁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정치 입문에서 청와대 비서실의 넘버 2(정책조정수석)에 오르기까지 5년도 걸리지 않은 ‘폭풍 성장’이다. 하지만 그 배경에는 2005년부터 이어진 박근혜와의 오랜 물밑 역사가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안종범이 정치권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사실 이보다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로 이회창이 대선에 처음 도전했던 1997년이다. 당시 안종범은 강석훈 등과 함께 비공개 그룹을 만들어 한나라당 후보였던 이회창을 도왔다. 대우경제연구소와 조세연구원을 거쳐 당시에는 서울시립대에서 교수로 있을 때였다. 이회창은 대선에서 지고, 안종범은 조용히 학계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오래지 않아 다시 정치권 주변으로 돌아왔다. 2000년쯤 안종범은 강석훈, 최경환, 이혜훈, 박재완, 이종훈 등과 함께 이회창 캠프에 모였다. 2002년 이회창 대선 캠프에서 안종범은 민생·복지특보로 활동했다.
안종범은 성균관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미국 위스콘신대학교에서 1991년 경제학 박사학위를 딴 재정 및 복지 전문가이다. 소장 학자로서 좋은 논문도 많이 발표했다. 위스콘신대 박사과정 때 썼던, 당시 미국 사회복지정책의 근간인 ‘아동부양가정 보조제도’(AFDC)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논문이 대표적이다. 유명한 학술지에 오른 이 논문은 1996년 클린턴 행정부가 이 제도를 폐지하고 대신 ‘한시적 빈곤가정 지원 제도’(TANF)를 도입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얼마 전 <신동아>가 학자 출신 주요 공직자들의 연구실적을 조사한 결과, 안종범은 총 논문 수(24)나 피인용 횟수(154)에서 상위권에 오르기도 했다.
전문가로서 공공부채의 급격한 증가를 질타하고, 국민연금 등 공적연금의 기금 고갈을 우려하는 보고서나 글을 자주 발표했다. 또 건전한 국가재정 운영을 일관되게 강조하곤 했다. 학문적인 객관성을 지닌 그의 논문이나 보고서는 나올 때마다 언론에서 주요하게 소개됐다. 2007년 대선과 2012년 대선 때 안종범과 함께 일했던 김광두 한국미래연구원 원장은 “그는 부지런하고 성실했으며, 재정 및 복지 분야 학자들 사이의 학문적 평도 꽤 좋았다”고 말했다.
2014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안종범 당시 새누리당 의원이 광화문광장에서 ‘도와주세요’라는 팻말을 들고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안종범 페이스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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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안> 기획위원 등 뉴라이트 활동
하지만 안종범은 학자로서의 길을 가는 것보다는 현실 정치에 참여하고픈 생각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2002년 이회창의 두번째 대선 도전을 도운 것이 실패한 뒤 안종범은 보수적 시민사회단체인 뉴라이트 운동에 적극 가담한다. 그는 2004년 보수 인터넷신문인 <데일리안>의 기획위원을 맡았으며, 이듬해 3월에는 뉴라이트 교수들의 모임인 ‘뉴라이트 싱크넷’의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또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만든 자유기업원의 자유주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2008년 10월에는 공기업 민영화를 요구하는 보수 시민단체인 공기업개혁시민연합의 공동대표를 맡았으며, 뉴라이트 운동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인 박효종(서울대 교수)이 주도하는 바른사회시민회의 운영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안종범은 날카로운 창을 지닌 뉴라이트 전사나 보수진영의 칼잡이는 아니었다. 성격이 모나지 않아서 두루 사람들과 잘 지냈다. 진보단체에서 주관하는 토론회에도 토론자로 자주 참석했다. 청와대를 출입했던 한 기자는 “그는 청와대나 현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기사를 써도 강하게 항의하거나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다”며 “매체 성향에 관계없이 기자들의 전화도 잘 받아줬다”고 말했다.
안종범은 일상생활에서도 대체로 평범했다. 휴일이나 집에서 쉴 때는 가족과 함께 드라마 보기를 좋아한다. 청와대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지상파는 물론 케이블 방송의 인기 드라마를 줄줄 꿸 정도였다. 드라마에 대해 자녀들과 같이 대화하는 것을 자랑했다.
그는 재산이 꽤 있는 집안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대구에서 섬유공장을 운영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유순했다. 대구중학교 시절 야구부 일화는 ‘착한’ 안종범의 전형이다. 운동을 좋아한 그는 야구부에 들어갔다. 훗날 홈런타자로 이름을 날리는 이만수가 함께 운동한 야구부 친구였다. 그러나 안종범은 얼마 안 돼 스스로 야구부를 그만뒀다. 공부에 집중하기를 원하는 부모가 야구를 반대할 것을 미리 헤아려서였다.
안종범은 박근혜 정부 초대 경제수석 후보로 거론됐지만 당에 남았다. 의아해하던 주변 사람들에게 그는 “국회에서 대선 공약을 관철시키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2016년 총선에서 고향인 대구나 주거지인 서울에서 출마하는 문제를 고민하기도 했지만, 언제든지 대통령의 부름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지역구 의원보다는 정책 집행을 하는 정부 쪽 일을 하고 싶어했다. 2014년 6월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임명받았을 때 안종범은 두말없이 의원직을 버렸다.
2005년부터 박근혜 도와
2012년 대선 땐 공약 총괄
1997년 이회창 대선 지원 등
오랫동안 정치권 문 두드려
이재만 등 3인방 관리 잘해
박근혜 최측근으로 접근
시류에 따라 소신 바꾸고
윗사람에 순종 ‘착한’ 스타일
그러나 안종범은 공공부채 해소, 재정건전성 확보 등 경제학자로서 가졌던 소신을 정책으로 구현하기는커녕 결국 공직자로서 해서는 안 되는 여러 범법행위를 도왔다. 포스코나 현대자동차, 케이티의 최고경영자를 만나 최순실 일가나 주변 인물들에게 재산상 이익을 주도록 부탁했다. 민간기업의 인사 채용과 특정인 승진을 압박하기도 했다. 미르재단과 케이스포츠재단을 불법적으로 구성하는 데도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대통령의 지시를 따른 것이었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대통령을 말렸어야 할 사안들이었다.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오른쪽)과 우병우 전 민정수석(왼쪽)은 ‘좌종범, 우병우’로 불릴 정도로 박근혜 대통령의 최측근의 지위에 올랐다. 지난달 20일 박 대통령이 주재한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두 사람이 얘기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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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줏대 없는 경제학자의 권력놀음” 비판도
왜 그는 망하는 길을 걸었을까. 그를 잘 아는 이들은 상사에게 순종만 하는 성격이 낳은 참사라고 말한다. 새누리당의 한 의원은 “안 수석은 한번도 박 대통령이 싫어하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시키는 대로만 했다”고 말했다. 2007년 대선이 끝나고 안종범이 박근혜를 물밑에서 도울 때 그의 지인은 “도우려면 직접 박근혜 대표를 상대해라. 보고서를 이재만한테 가져다주지 마라. 그러면 결국 이재만의 졸개가 되고 만다”고 조언을 했다. 하지만 안종범은 ‘감히’ 그러지 못했다. 대신 이재만 등 3인방에게 밥 사주고 술 사주면서 관계를 더 돈독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박근혜 권력에 더 다가가는 지름길이었다. 박근혜 정권의 실세인 최경환과도 매우 가깝게 지냈다.
전문가로서의 자기 분야에 대한 지식만 있었을 뿐 공직자로서 지켜야 할 법과 규범에 대한 훈련이 안 돼 있었던 점도 안종범의 몰락을 자초했다는 분석이다. 김광두 원장은 “직업 공무원들은 할 수 있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오랫동안 체득해서 잘 구분할 줄 아는 데 비해 교수 하다가 고위직에 발탁된 사람들은 그런 것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다. 그렇다 보니 위험한 일에 자주 빠진다. 안 수석도 그런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안타깝다”고 말했다.
소신과 철학보다는 자리 욕심이 더 강했던 것도 이번 사태를 초래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수적 경제학자인 그는 성장 우선주의자였지만, 시류에 따라 견해를 달리했다. 2007년에는 신자유주의에 바탕을 둔 줄푸세 공약을 만들었다가 2012년에는 경제민주화를 앞세운 공약을 내놓았다. 학자 때는 “지금의 복지지출이 계속되면 2050년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18.7%로 남유럽과 같은 재정위기에 처할 것”(‘장기복지 재정계획’ 보고서·2011년)이라고 경고했지만, 새누리당 의원이 된 이듬해 7월에는 당의 경제민주화 정책에 따라 ‘0~2세 무상보육’ 폐지를 주장하는 재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새누리당의 한 전직 의원은 “권력에는 양면이 있는데 줏대 없는 학자가 그걸 잊은 채 권력놀음에 취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