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기무사령부.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문제의 본질은 계엄령 문건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라는 26일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은 촛불시민을 상대로 한 박근혜 정부 군부의 민주주의 무력 진압과 쿠데타 모의라는 핵심에서 벗어나 문건 보고 과정을 둘러싼 이전투구 양상으로 치닫는 흐름을 방관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아울러 문 대통령은 볼썽사나운 공방을 벌인 송영무 국방장관과 기무사령부 양쪽 모두에게 “합당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힘으로써 향후 대대적인 인사 조치를 예고했다.
문 대통령은 기무사 계엄령 문건 논란이 불거진 이후 두차례 지시를 내렸다. 문 대통령은 인도 국빈 방문 중이던 지난 10일 계엄령 문건과 관련한 국방부 독립 수사단 구성을 지시했고, 16일엔 “국방부, 기무사와 각 부대 사이에 오간 모든 문서와 보고를 즉시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들은 모두 광화문과 여의도에 탱크와 장갑차, 무장병력을 투입해 평화로운 촛불시위를 무력진압하고, 국회의 계엄해제 권한을 차단하는 등 기무사의 헌정 유린 모의에 대한 진실 규명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 흐름은 문건 내용이 아닌 기무사 문건 보고 과정을 둘러싼 정치권 공방으로 흘러갔고, 급기야 국회에서는 송 장관과 기무부대 지휘관이 공개적인 진실공방을 벌이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에 문 대통령은 본질이 흐려지는 양상에 강한 우려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가 “달(문건 진상 규명)을 봐야지 왜 손가락을 보느냐”고 답답함을 토로할 정도였다.
(왼쪽) 송영무 국방부 장관이 26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로 출근하며 전화통화를 하고 있다. (오른쪽) 국군기무사령부 소강원 참모장이 이날 오후 서울 용산구 국방부 특별수사단에 출석하며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문 대통령이 “기무사 개혁의 필요성이 더 커졌다”고 한 배경은, 본질이 오도된 이면에 기무사의 조직적인 반발이 자리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인 듯하다. 특히 기무사는 전날 “위수령은 잘못된 게 아니다”라는 송 장관의 발언이 담긴 장관 주재 간담회 동정 문건을 이례적으로 공개하면서 송 장관의 거짓말 논란을 확산시켰다. 문 대통령은 이런 과정을 개혁에 반발하는 기무사의 조직적인 움직임이라고 본 듯하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문 대통령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갈등 양상을 보면서 그런 판단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여당 지도부도 이런 문 대통령의 인식과 맥락을 같이했다. 홍영표 원내대표는 민주당 정책조정회의에서 “기무사 사건의 본질은 내란음모다. 이를 흐리려는 어떤 시도도 있어서는 안 된다”며 기무사 개혁이 아니라, 사후 보고 ‘진실공방’으로 흐르고 있는 양상을 경계했다. 그는 “기무사 개혁의 본질을 흐리는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기무사 관계자들이 어제도 사후 보고 경위를 둘러싼 진실공방을 부추기는 폭로를 내놓고, 일부 야당이 편승하고 있다”며 “기무사 개혁에 반대하는 조직적 저항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고 말했다. 김태년 정책위의장 역시 “누가 거짓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가 본질이 아니다”라며 “중요한 것은 보고서가 만들어진 배경”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조기에 기무사 개혁을 마무리하겠다는 뜻을 강하게 표시했다. 그는 “기무사 개혁 티에프(TF)가 이미 검토를 많이 한 것으로 안다”며 “기무사 개혁안을 서둘러 제출해줬으면 한다”고 재촉했다. 최근 장영달 기무사 개혁위원장이 “국민들이 불신을 해서 개혁을 해도 믿을 수 없는 상태가 온다면 해체를 하고 새로 시작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발언을 한 것으로 미뤄보면 문 대통령은 기무사 해체라는 특단의 조치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 대변인은 “적절한 시점에 문 대통령이 보고를 받으실 것”이라며 “장 위원장이 티에프에서 논의를 서두르실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이 26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계엄령 문건' 논란과 관련한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을 전하고 있다. 연합뉴스
아울러 문 대통령은 “기무사 개혁 티에프 보고 뒤 그 책임의 경중에 대해 판단하고, 합당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해 송 장관에 대해서도 엄중히 책임을 물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송 장관은 기무사 계엄령 문건을 잇따라 누락·부실 보고해 논란의 빌미를 제공하고, 하급 지휘관과 진실 공방을 벌이며 스스로 ‘영이 서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합당한 조치에 경질도 포함되느냐’는 물음에 “책임을 따져보고 그에 따라 판단하실 것”이라고 답해 경질 가능성을 시사했다. 청와대는 송 장관을 교체할 경우 국방개혁안 추진이 차질을 빚게 되고, 인사청문회를 통과할 만한 적임자를 찾기 어렵다는 점에 고심을 거듭해왔다. 하지만 문건 보고 과정에서 드러난 송 장관의 미숙한 판단과 국회 거짓말 공방 사건에서 타격을 입은 그의 군 장악력을 고려하면 더는 재신임을 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야당은 이날도 거듭 송 장관 퇴진을 요구했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이날 의원총회 뒤 기자들과 만나 “송 장관의 사퇴 촉구는 이미 자유한국당의 입장이었다”며 “송 장관이 허위 진술로 국회와 국민을 속인 것이 드러나면 그에 대한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밝혔다. 김관영 바른미래당 원내대표는 “계엄 문건의 본질은 문건 작성의 경위, 보고 경위 등”이라며 송 장관이 자진사퇴하지 않으면 다른 야당과 함께 해임건의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성연철 정유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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