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독자 개발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이 15일 도산 안창호함(3000t급)에 탑재돼 수중에서 발사되고 있다.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은 현재 미국과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인도 등 6개 나라만 운용하고 있는 무기체계다. 한국은 세계 7번째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운용국이 됐다. 국방부 제공
남북 관계가 아슬아슬하다. 남과 북이 같은 날 미사일을 쏘며 무력시위를 했다. 남쪽은 잠수함에서 탄도미사일을, 북쪽은 기차에서 탄도미사일을 쐈다. 남쪽은 “북한의 도발에 대한 확실한 억지력”이라고, 북쪽은 “위협세력에 대한 동시다발적인 집중타격능력 높이기”라고 자평했다. 자기를 지키려는 무장력 강화가 상대의 공포를 자극해 군사적 맞대응으로 이어지는 ‘안보 딜레마’라는 악순환의 수렁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9월 평양공동선언’ 세 돌(9월19일)과 남·북 유엔 동시·분리 가입 서른 돌(9월17일)을 코 앞에 둔 한반도의 살풍경이다.
하지만 남과 북은 ‘미사일 무력시위’를 갈등과 충돌의 불쏘시개로 삼기보다는, 일단 한숨을 고르며 여지를 뒀다. 통일부는 16일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정착, 남북관계를 진전시키는 가장 좋은 길은 대화와 협력”이라며 “남북의 대화와 협력을 조속히 재개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겠다”는 ‘정부 입장’을 내놨다. 김여정 조선노동당 중앙위 부부장은 전날 심야 담화에서 “북남관계 완전 파괴” 운운하며 공갈을 치고는 곧바로 “우리는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발을 뺐다. 김정은 위원장은 미사일 발사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미사일 발사’와 짐짓 거리두기를 지속했다. 남과 북 모두 ‘남북관계 끝!’을 외치지 않으며, ‘다른 길’을 향한 암중모색을 지속할 뜻을 내비친 셈이다.
15·16일 이틀동안 남과 북에서 나온 신호는 날카롭고 복잡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15일 국방과학연구소 안흥 종합시험장에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의 잠수함 발사시험을 직접 봤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문 대통령이 “북한의 도발”을 세차례 입에 올렸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앤에스시) 상임위원회도 “북한의 연속된 미사일 발사 도발”에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고 했다. 앤에스시가 “북한의 도발”을 발표자료에 적시한 건 올해 들어 처음이고, 문 대통령이 한 자리에서 세 차례나 “북한의 도발”을 입에 올린 일도 전례를 찾기 어렵다. “북한의 도발”이라는 이례적 표현의 공개 사용에 고도의 정무적 판단이 깔려 있음을 짐작케 한다.
이와 관련해 문 대통령은 “오늘(15일) 우리의 미사일 전력 발사 시험은 북한의 도발에 대응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체적인 미사일 전력 증강계획에 따라 예정된 날짜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핵·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앞세운 북한의 군사력 증강을 불안해하는 국민들한테 대북 견제 능력이 충분함을 강조·설득하려는 국내 정치용 행보이지 ‘대북 무력시위’는 아니라는 얘기로 들린다.
김여정 부부장도 11·12일 순항미사일 발사와 15일 탄도미사일 발사가 “그 누구를 겨냥하고 그 어떤 시기를 선택해 ‘도발’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지난 1월 8차) 당대회 결정 관철을 위한 국방과학발전 및 무기체계개발 5개년 계획의 첫해 중점과제 수행”을 위한 “정상적·자위적 활동”으로, “남조선의 ‘국방중기계획’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한반도 정세를 흔들 목적의 ‘군사행동’은 아니라는 해명이다. 이어 문 대통령의 ‘도발’ 발언을 겨냥해 “부적절한 실언”이라며 “매우 큰 유감을 표시”한다고 했다.
<노동신문>은 “철도 기동 미사일 연대는 9월15일 새벽 중부산악지대로 기동하여 800km 계선의 표적 지역을 타격할 임무를 받고 훈련해 참가”해 “조선 동해상 800km 수역에 설정된 표적을 정확히 타격했다”고 1면에 보도했다. 북한판 이스칸데르 개량형으로 추정되는 단거리 탄도미사일이 화염을 내뿜으며 열차에서 발사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16일 <노동신문>은 전날의 탄도미사일 발사는 “박정천 동지(당비서)가 철도 기동 미사일 연대의 검열 사격 훈련을 지도”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김여정 부부장의 심야 담화는 대외용으로 일반 인민이 접하지 못하는 <조선중앙통신>으로만 공표되고, 인민들이 읽을 수 있는 <노동신문> 16일치에는 실리지 않았다. 김 부부장이 처음으로 문 대통령의 실명을 적시해 비판한 담화 내용을 인민들한테 알리지 않은 것이다. 북쪽 최고 지도부의 ‘상황 관리’로 읽힌다.
북한 읽기에 밝은 전직 정부 고위 관계자는 “김여정 부부장의 담화는 전에 비해 (욕설이나 비아냥거림이 없이) 상대적으로 순화된 어법을 구사한 게 눈에 띈다”며 “북쪽이 현재의 남북관계를 아주 나쁘게 보고 있지는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다만 이 고위 관계자는 “북-미 관계에 진전이 없다면, 북쪽의 저강도 군사행동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외교안보 분야 원로 인사는 “북·미 대화가 성사되기 전까지는 북한이 긴장·위기 수위를 높이는 (군사) 행동의 강도를 완만하지만 지속적으로 높일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이제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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