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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방·북한

“뼈에는 색깔 없다는 ‘김철호 정신’ 지리산 자연에 녹여내야죠”

등록 2021-11-07 18:32수정 2021-11-08 02:32

[짬]
‘평화의 소녀상’ 김운성 조각가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김운성(오른쪽) 작가와 서중석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전 이사가 지난 29일 전남 구례군 봉서리 봉성산 자락에 있는 ‘한겨레 생명평화공원’에서 새로운 생명평화의 상징물을 만들기로 다짐하며 손을 맞잡고 있다. 김보근 선임기자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김운성(오른쪽) 작가와 서중석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전 이사가 지난 29일 전남 구례군 봉서리 봉성산 자락에 있는 ‘한겨레 생명평화공원’에서 새로운 생명평화의 상징물을 만들기로 다짐하며 손을 맞잡고 있다. 김보근 선임기자

“이념 문제로 여전히 갈등하는 사람들, 미래의 평화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편하게 손잡을 수 있는 곳이 되면 좋겠습니다.”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김운성(57) 작가가 지난 29일 전남 구례군 봉서리 봉성산 자락에 있는 ‘한겨레 생명평화공원’을 둘러보며 말했다. 김 작가의 말에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전 이사인 서중석(73)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가 웃으면서 공감을 표했다.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이사장 문정인)과 김 작가는 앞으로 이 공원에 평화와 생명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함께 만들 예정이다.

‘한겨레 생명평화공원’은 한반도의 분단 희생자를 위령하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해방 이후 사업을 크게 일으킨 혁신적 기업인이자 사회사업가였던 고 김철호(1922~1995) 선생이 1990년대 첫발을 내디뎠다. 고인과 오랜 친분을 유지했던 서 명예교수는 “고인이 1990년 지리산 일대를 찾았을 때, 한국전쟁 전후에 희생된 이들의 유골을 누구도 수습하지 않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셨다”며 “고인은 유골에 좌익·우익이 있을 수 없고, ‘뼈에는 색깔이 없다’며 60대 중반의 나이에 직접 움막을 짓고 현 한겨레 평화공원 터에 분단 희생자를 위령하기 위한 공원을 가꾸어 나가셨다”고 고인의 발자취를 되돌아봤다.

고 김철호 선생은 1995년 말기암 판정을 받자 조성 중이던 1만2천평 공원 터와 5억원을 한겨레에 기부했고, 이는 1996년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이 출범하는 기초가 됐다. 재단은 이후 지리산 산돌로 5m 높이의 ‘민족분단희생자위령탑’ 3기를 쌓고, 북파공작원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가족이 함께 ‘평화의 탑’을 쌓는 행사 등 평화를 위한 각종 행사를 진행해왔다. 최근에는 고 김철호 선생이 기거하던 움막을 헐고 전시공간용 건물을 새로 지었다.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은 고 김철호 선생이 1990년대 중반 한겨레 생명평화공원 조성 과정에서 기거하던 움집을 헐고 조그만 전시공간을 새로 만들었다.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은 고 김철호 선생이 1990년대 중반 한겨레 생명평화공원 조성 과정에서 기거하던 움집을 헐고 조그만 전시공간을 새로 만들었다.

이런 노력에도 이 땅의 갈등은 크게 완화하지 않았고, 생명·평화에 이르는 길은 여전히 멀게만 느껴진다. 어떤 측면에서는 갈등을 악화시키는 새로운 요인들도 등장했다. 김운성 작가는 “지금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알고리즘까지 ‘색깔’을 만드는 상황이 된 것 같다”고 말한다.

한겨레통일문화재단과 김운성 작가가 김철호 선생의 ‘뼈에는 색깔이 없다’는 정신을 ‘현 시대 버전’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힘을 모으기로 한 까닭이다.

김 작가의 작품 활동도 ‘뼈에는 색깔이 없다’는 정신과 닿아 있다. 1987년 중앙대 예술대 학생회장을 지낸 김 작가는 대학 동기인 부인 김서경 작가와 함께 2011년 12월14일 1000번째 수요집회를 기념해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는 등 굴곡진 우리 역사를 성찰하는 작품을 만들어왔다. 그는 이밖에도 미선이 효순이 추모비, 일본 교토 단바망간광산 앞 강제징용 노동자상, ‘베트남 피에타’, 동학 100주년 기념 무명 농민군 추모비, 백남기 농민 추모 조형물 등 ‘과거를 되돌아봄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진정한 화해를 준비하는’ 작품 활동을 해왔다.

고 김철호 선생이 90년대 초부터
분단 희생자 위령 목적으로 만든
전남 구례 한겨레 생명평화공원에
한겨레통일문화재단과 손잡고
평화와 생명 상징 조형물 만들기로

내달 17~19일 지리산생명평화학교

그는 한겨레 평화공원에 들어설 작품도 ‘드러냄’과 ‘모음’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아직도 구례 지역을 포함해 각지의 연로한 주민들이 이념 대립과 전쟁의 상처에 대해 얘기하기를 꺼립니다.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운동장에 끌려와 단지 ‘좌익’이냐 ‘우익’이냐는 권력자의 지목에 의해 처형돼야 했던 그 시대의 아픔은 지금도 드러내어 살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새 작품은 이런 ‘드러냄’의 과정에서 그치지 않는다. 미래의 생명과 평화에 대한 우리 시대의 고민을 찾아 모으는 ‘모음’의 과정도 거칠 예정이다.

김 작가는 “한겨레통일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지리산 생명평화학교’ 등을 통해 중장년층에서 청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재단이 주최하는 지리산 생명평화학교는 지리산 천은사와 한겨레 생명평화공원 등지에서 평화를 주제로 강연을 듣고 대화를 나누는 행사다. 지난 9월 초 1회 행사를 연 데 이어, 오는 12월17~19일 두번째 행사를 한다. 김 작가는 이 행사에서 ‘독일이 예술을 통해 어떻게 과거사를 기억하는지’를 주제로 강의하고, 참석자들과 함께 한겨레 생명평화공원에 대한 의견을 모을 예정이다.

김 작가는 “뜻이 맞는 교사들과 이야기해 초중고 수업에서도 미래의 생명평화에 대해 그림을 그리게 하는 등 다양한 계층의 의견을 모아나갔으면 한다”고도 했다. “아이들이 툭 던져주는 내용도 가슴에 다가오는 것이 있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그는 또 “서중석 교수님과 같은 원로 사학자를 비롯해 사회학자나 철학자도 찾아뵙고 평화와 생명에 대한 의견을 구할 계획”이라고 했다.

김 작가는 “사실 작품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많은 스케치를 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작가가 골방에서 구상한 작품이 아닌 많은 사람의 의견을 모으고 반영해 완성해가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이렇게 모인 생명·평화에 대한 이야기들을 지리산의 햇살과 물 등 자연에 녹여내는 과정을 거쳐 작품을 완성할 계획”이다.

‘뼈에는 색깔이 없다’는 믿음을 통해 한 시대의 화해와 평화를 그리고자 했던 고 김철호 선생의 정신이 ‘새로운 시대정신과 함께 호흡하려는’ 김운성 작가에 의해 어떻게 구현될지 기대된다.

김보근 선임기자 tr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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