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정선엽 병장의 묘.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위원회)는 24일 제51차 정기회의를 열어 12·12 군사반란에 맞서다 숨진 ‘정 병장’ 사건 내용을 공개했다.
1979년 12월 당시 제대를 석 달 앞둔 정선엽 병장은 서울 용산 국방부를 지키는 헌병이었다. 그러나 그해 12월12일 전두환 등 신군부의 군사반란이 일어났다. 12월13일 새벽 신군부 주요 인물인 박희도 1공수여단장이 지휘하는 공수부대 병력이 국방부를 점령하려고 몰려왔다.
당시 정 병장은 국방부 지하벙커 입구에서 초병 근무를 하고 있었다. 13일 새벽 1시40분께 국방부를 점령한 공수부대원들이 정 병장의 엠(M)-16 소총을 빼앗으려 하자 정 병장은 “줄 수 없다”고 맞섰다. 이 과정에서 정 병장은 한 공수부대원이 쏜 총에 목과 가슴을 맞고 현장에서 숨졌다. 1공수여단은 당일 일지에 “벙커 출입구 헌병 근무자 2명 중 1명 체포, 1명은 반항 사격과 함께 벙커로 도주 사살됨”이라고 기록했다. 이같은 사실은 지난 3월21일 열린 위원회 제49차 정기회의에서 진상이 규명됐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신군부의 위세가 등등했던 1990년대 초반까지는 침묵해야 했다. 문민정부가 ‘역사바로세우기’로 신군부를 본격 조사한 1995년에야 정 병장 어머니는 겨우 한을 토해냈다. “선엽이가 그때 갖고 있던 총을 순순히 반란군에 건네줬으면 목숨만은 건질 수도 있었을 텐데…. 12·12 반란군들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한겨레> 1995년 12월12일치)
위원회는 이날 “정 병장은 반란군의 위법한 무장해제에 대항하다 살해당한 것으로서, 고인의 행위는 군사반란을 저지하기 위한 교전의 일환”이라며 “고인의 사망은 군인사법 제54조의2 제1항 제1호 규정에 따라 사망의 구분이 ‘전사’가 마땅하나 ‘순직’으로 분류한 것은 부당한 조치”라고 밝혔다. 위원회는 고인의 사망 구분을 ‘순직’에서 ‘전사’로 재심사해, 명예를 회복시킬 것을 지난 3월 국방부 장관에게 요청했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정 병장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12·12 군사반란에 맞선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지키다 반란군의 총격에 숨진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중령(당시 소령)의 사망 구분이 ‘순직’으로 되어 있으나 구체적인 경위가 국가기관 조사를 통해 공식적으로 기록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군사반란과 김 중령 사망의 관계를 밝혀 고인과 유족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도록 직권으로 조사 개시를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권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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