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직후 미 제2군수기지 사령관
미 의회 청문회 불려갔으나 ‘기립박수’
11일 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 훈장 추서
미 의회 청문회 불려갔으나 ‘기립박수’
11일 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 훈장 추서
부산 유엔평화기념관에 상설전시된 리차드 위트컴 장군 사진. 유엔평화기념관 누리집 갈무리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다.”한국전쟁 직후 부산 화재 이재민에게 군수품을 무단 방출했다는 이유로 미국 의회 청문회에 불려간 리차드 위트컴 미 제2군수기지 사령관(준장)이 한 말이다. 그 순간 그를 추궁하려던 의원들은 기립 박수를 보냈다. 1953년 11월 부산역 앞 판자촌에서 불이나, 주택 수천채가 불타고 3만명 이상의 이재민이 생겼다. 당시 한국에 주둔한 미 제2군수기지 사령관인 위트컴 장군은 상부의 승인 없이 군수창고를 개방해 2만3100명분의 식량·옷 등 군수물자를 이재민들에게 긴급 지원했다. 예하 공병부대를 투입해 화재 복구를 지원하고 4만명이 지낼 임시 천막촌도 준비했다. 위트컴 장군은 부산역 앞 대화재 이후 도시 재건 프로그램 계획 수립·실행에도 참여했다. 이재민에 대한 1100채 주택 건설을 돕고 화재·교통문제의 근원적 해결을 위해 현대식 도로 건설에도 나섰다. 그는 부산대학교와 초·중·고등학교, 현대식 병원 건립도 도왔다. 그는 부산에 메리놀병원을 짓기 위해 갓을 쓰고 한복을 입고 거리 모금 캠페인을 벌였고, 예하 부대 장병들에게 월급의 1%를 병원 공사비에 기부하게 했다. 부산대 장전동 캠퍼스 부지를 무상으로 확보할 수 있도록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했고, 미 공병 부대를 동원해 부산 동래구 온천동과 부산대를 연결하는 도로를 개통시켰다. 그는 1954년 퇴역한 뒤 한국에 남아 전쟁고아 돕기와 북한 내 미군 유해 발굴에 평생을 헌신했다. 그는 크리스마스에는 산타 클로스 옷을 입고 전쟁고아들이 있는 전국 보육원을 찾았다. 그는 보육사업을 하던 한묘숙 여사와 1963년 결혼해 전쟁고아를 돌봤다. 그의 이름 앞에는 ‘전쟁고아의 아버지’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등의 수식어가 붙었다 그는 냉전이 한창이던 1960년대부터 사비와 연금을 털어 북한 내 미군 유해를 송환하려고 애썼다. 그는 1950년 11월 장진호 전투에서 숨진 미군 장병들의 유해가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본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1982년 7월12일 작고한 위트컴 장군은 “내가 죽으면 한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부산 유엔기념공원 내 미국 묘역에 안장돼 있다. 국가보훈처는 8일 “오는 11일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을 계기로 고 리차드 위트컴 장군에 대한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안이 이날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고 밝혔다. 11일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거행되는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식’에서 한덕수 국무총리가 위트컴 장군의 유족인 민태정 위트컴희망재단 이사장에게 훈장을 전수할 예정이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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